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7, 신당서 토번전-19) 끝.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신당서 토번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신당서(新唐書)卷216 토번전(吐蕃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新唐書/列傳/卷二百一十六上(吐蕃上) 번 역 문 | 원 문 | 86) 함통 2년(861), 장의조가 양주(涼州)를 봉헌하며 귀부했다. [함통] 7년(866) 북정(北庭) 회골의 복고준이 서주(西州: 고창)를 공격해서 취하고 여러 부를 수복했다. 선주성사(鄯州城使) 장계옹이 상공열과 싸워 이겨, 장비와 무기 등을 수거하여 바쳤다. 토번의 무리가 빈주(邠), 영주(寧)를 침입하니 절도사 설홍종이 이를 막았다. 마침 복고준이 토번과 크게 전쟁을 벌였는데, 상공열을 참수하여 이를 경사(장안)에 보냈다. | 咸通二年,義潮奉涼州來歸。七年,北庭回鶻僕固俊擊取西州,收諸部。鄯州城使張 季顒與尚恐熱戰,破之,收器鎧以獻。吐番餘眾犯邠、寧,節度使薛弘宗卻之。會僕固俊與 吐蕃大戰,斬恐熱首,傳京師。 | 87) [함통] 8년(867), 장의조가 입조하니 우신무통군(右神武統軍)에 임명하고, [경사에] 저택과 농토를 주었으며, 족자(族子) 장회심에게 귀의군을 지키도록 했다. [함통] 13년(872) [장의조가] 죽었다. 사주(沙州)는 장사(長史) 조의금에게 담당하게 하였고, 곧 귀의절도사에 임명했다. 이후 중원에 많은 일이 발생하여 왕명이 이르지 못하니, 감주(甘州)는 회골에 병탐되었고, 귀의(歸義)의 모든 성도 다수 함락되었다. | 八年,義潮入朝,為右神武統軍,賜第及田,命族子淮深守歸義。十三年卒。沙州以長 史曹義金領州務,遂授歸義節度使。後中原多故,王命不及,甘州為回鶻所幷,歸義諸城 多沒。 | 88) 혼말(渾末)은 올말(嗢末)이라고도 하는데, 토번의 노예 부락이었다. 토번의 법에 출병할 때는 반드시 호족에서 징발하도록 하였으니, 모두 노예로 종군하게 하였고, 평시에는 흩어져 살며 농사와 목축에 종사했다. 상공열의 반란을 맞아 돌아갈 곳이 없었는데 서로 불러 모으니 수천 명에 이르러, 올말(嗢末)이라고 자칭하고, 감주, 숙주, 과주, 사주, 하주(河), 위주(渭), 민주(岷), 곽주(廓), 첩주(疊), 탕주(宕) 사이에 거주하였는데 토번 아장(牙帳) 근처에 있는 자가 가장 용맹했고, [그들의] 말도 매우 우량했다.< 신당서 토번전 끝. > | 渾末,亦曰嗢末,吐蕃奴部也。虜法,出師必發豪室,皆以奴從,平居散處耕牧。及恐 熱亂,無所歸,共相嘯合數千人,以嗢末自號,居甘、肅、瓜、沙、河、渭、岷、廓、疊、宕間,其 近蕃牙者最勇,而馬尤良云。 | 89) 찬하여 말한다. “당이 흥하여 사방의 오랑캐가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모두 군대를 내어 정벌하고, 그들의 아장(牙帳)을 짓밟았으며, 조정을 갈아엎은 후에야 그만두었다. 오직 토번, 회골만이 강성함을 떨쳐 중국의 걱정거리가 됨이 가장 오래되었다. 젠뽀는 하(河), 황(湟) 전역을 빼앗고, 경사의 근교까지 접근하여 동쪽의 국경을 삼았으며, 경사를 침범하고 주변을 약탈하면서 화인(華人)을 잔인하게 도륙했다.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가 모여서 살피고 함께 계책을 논의했으나 문제의 핵심을 찾아내지 못했다. 뒤늦게 토번과 회골이 스스로 망했으나 당도 역시 쇄하였다. 무릇 밖으로 위무하고 안으로 편안하게 해야 한다고 했으니, 이는 오직 성인만이 양보하지 않은 일이다. 현종은 높은 덕의 소유자였으며, 너른 영토를 개척하고, 먼 곳의 공에 힘썼으나, 가까이의 근심을 홀시하여, 역적이 일어나고, 중원이 분열되어, 이백 년간 수복할 수 없었으니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먼저 안으로 다스리고 나서 사방 오랑캐의 외환을 없애는 것이 이미 이룩한 성취를 지키는 좋은 계책이다.” | 贊曰:唐興,四夷有弗率者,皆利兵移之,蹷其牙,犂其廷而後已。惟吐蕃、回鶻號彊 雄,為中國患最久。贊普遂盡盜河湟,薄王畿為東境,犯京師,掠近輔,殘馘華人。謀夫虓 帥,圜視共計,卒不得要領。晚節二姓自亡,而唐亦衰焉。夫外撫內寧,惟聖人不讓。玄宗 有逸德,而拓地太大,務遠功,忽近虞,逆賊一奮,中原封裂,訖二百年不得復完,而至陵夷。 然則內先自治,釋四夷為外懼,守成之良資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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