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8, 구당서 토번전(하)- 8) 끝.

상 상 2014. 12. 5. 17:38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8, 구당서 토번전()- 8) .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8)

 

 

구당서 토번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구당서(舊唐書)196토번열전(吐蕃列傳) 146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舊唐書卷一百九十六下

77) 장경 원년(821) 6월에 청새보(靑塞堡)를 침입하였는데, 이는 우리(당나라)와 회흘이 화친한 까닭이었다. 염주자사 이문열이 발병하여 이를 물리쳤다. 9월에 토번이 사신을 보내 회맹을 청했고, 황상이 이를 허락했다.(토번과 당 사이에 맺어진 최후의 회맹인 장경회맹) 재상(宰相)이 이 일을 정중하게 처리하고자 태묘에 고하기를 청하였는데, 태상예원에서 주를 올려 말하기를, “삼가 ()숙종과 ()대종의 선례를 살펴보면, 토번과 회맹할 때 모두 태묘에 고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덕종, 건중 말년에 토번과 연평문에서 회맹할 때 그 성신(誠信)을 중히 여겨 특별히 명하여 태묘에 고한 적이 있습니다.(건중 말년의 회맹은 783년 거행된 청수회맹을 뜻한다)

정원 3(787)에 이르러, 평량에서 회맹할 때 역시 태묘에 고했다는 기록은 없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이 일은 일시적인 것으로 상례는 아니며, 전례(典禮)에서 구해 보아도 관련된 기록이 없습니다. 지금 삼가 상세히 살펴보니, 태묘에 고함은 적합하지 않은 듯합니다.”라고 하여, 이를 따랐다. 이윽고 대리경 겸 어사대부 유원정에게 서번회맹사(西蕃盟會使)에 충임하도록 하고, 병부랑중 겸 어사중승 유사로를 부사로 삼았으며, 상사봉어 겸 감찰어사 이무, 경조부 봉선현승 겸 감찰어사 이공도를 판관으로 삼았다. 1010일에 토번의 사신과 회맹하니, 재상과 신료 및 우복야 육조상서, 중집법, 태상, 사농경, 경조윤, 금오대장군이 모두 참석했다. 회맹의 글에서 말하기를, “()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리니, 위엄과 교화가 이른 곳마다 입조하지 않음이 없었다. 삼가 주의를 기울이고 대업에 경주하며, [나라가] 전복됨을 두려워하였고, 문무의 전통을 이어받아 영광과 기쁨을 거듭 쌓았으며, 깊은 지혜를 명현하게 하여 황제의 업을 더럽힘이 없기를 12대를 이어 204년에 이르렀다. 우리 태조(太祖)는 황제로서의 운명을 받아 쥐고, [나라의] 근간을 공고히 하였으며, 그의 명성이 세상에 퍼져 영구하게 되었고, 상제(上帝)에게 제사 드리니 화답하시기가 매우 상서로웠으며, 황령(皇靈)에 봉사(奉祀)하니, 큰 복을 베푸셨다. 어찌 [우리가] 태만할 수 있겠는가? 때는 바야흐로 계축년(장경 원년이 신축년임) 겨울 10월 계유일에 이르렀는데, 문무효덕황제(당 목종)가 조서를 내려 승상 신하 최식, 신하 왕파, 신하 두원영 등이 대장 화번사(和蕃使) 예부상서 논눌라 등과 경사(京師: 장안)에서 회맹하였는데, 회맹단은 도성의 서쪽 교외에 두고, 구덩이는 단의 북쪽에 파도록 했다. 대략 [진행 순서를 살펴보면,] 맹서문을 읽고, 희생을 죽이고, 희생 위에 맹서문을 붙이고, 복양(復壤), 척강(陟降), 주선(周旋)의 예를 차례로 거행함에 조금도 거스름이 없었으니, 이는 대개 전쟁을 멈춰 백성을 쉬게 하고, 결혼 관계를 중히 여겨 상호 좋은 관계를 지속하며, 힘써 원략(遠略)을 세우고, 먼 이익을 도모한 까닭이다. 원래 푸른 하늘은 위에 있고, 누런 땅은 아래에 있듯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무리들은 반드시 관아에 의지하여 필요한 것을 얻고 또 그곳에 신속되기 마련이지만, 잠시라도 강령이 없으면 곧 서로 다투어 절멸되기 마련이었다. 현재 중원을 통치하는 자는 오직 당()의 군주뿐이며, 서쪽 변방에서는 대번(大蕃:토번)이 주인이다. 오늘 이후로, 전쟁은 물리고, 오랜 원한은 일거에 없애도록 하여, 삼촌과 조카 관계를 중히 여기고, 옛날처럼 서로 힘을 모아 돕도록 한다. 이에 변방의 요새는 경계를 중지하고, 봉수대는 다시 불을 피우지 않으며, 어려운 일은 서로 돕고, 사납게 약탈하는 일은 다시 하지 않으며, 당과 토번 양측 변경 요새를 서로 침입함을 그만두도록 한다. 옷깃과 허리띠처럼 산천이 빙 둘러쳐진 요충지를 삼가 옛날과 같이 굳게 지키고 있어, 서로 속일 것이 없으니, [또한] 서로 근심할 것도 없다. ! 사람을 아끼는 것은 인()으로 하고, 경계를 지키는 것은 신의로 한다고 하였으며, 하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로 하며, 신을 섬기는 것은 예로 한다고 하였으니, 만약 그 중 하나라도 온전히 하지 못한다면 곧 재앙이 자신에게 닥칠 것이다. 변경의 산은 높고, 물은 굽이쳐 흐르며, 일신(日辰)이 길할 때, 두 강역을 정하니, 서쪽은 대번(大蕃:토번)이요, 동쪽은 거당(巨唐:당나라)이 자리하였다. [우리] 대신이 문서를 가지고 서방에 널리 알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번(大蕃:토번)의 찬보 및 재상 발천포, 상기심아 등이 앞서 보낸 회맹의 글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토번과 당 두 나라는 각자의 영토를 지켜, 서로 정벌하지 않고, 토벌하지 않으며, 서로 침범하여 되갚지 않고, 도모하여 상대방의 변경을 침입하지 않도록 한다. 만약 의심되는 점이 있거나, 백성이 월경하는 일로 묻고자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의복과 식량을 주어 돌려보낸다.” 지금까지도 하나하나 의거해 따르고, 다시 첨가하거나 고침이 없었다. 회맹에 참석한 관원은 모두 17명으로, 문서에 이름을 열거하여 서명했다. 그 중 유원정 등은 논눌라와 함께 토번에 가서 [토번에서 거행된] 회맹에 참석했는데, 황상이 유원정에게 칙유를 내려 그곳에 가면 재상 이하 관원으로 하여금 문서의 뒷면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영무절도사 이진성이 태석산 아래에서 토번의 3천 기()를 격파했다.

長慶元年六月犯青塞堡以我與迴紇和親故也鹽州刺史李文悅發兵進擊之九月吐蕃遣使請盟上許之宰相欲重其事請告太廟太常禮院奏曰:「謹按肅宗代宗故事與吐蕃會盟並不告廟唯德宗建中末與吐蕃會盟於延平門欲重其誠信特令告廟至貞元三年會於平涼亦無告廟之文伏以事出一時又非經制求之典禮亦無其文今謹參詳恐不合告。」從之乃命大理卿兼御史大夫劉元鼎充西蕃盟會使以兵部郎中兼御史中丞劉師老為副尚舍奉御兼監察御史李武京兆府奉先縣丞兼監察御史李公度為判官十月十日與吐蕃使盟宰臣及右僕射六曹尚書中執法太常司農卿京兆尹金吾大將軍皆預焉其詞曰維唐承天撫有八紘聲教所臻靡不來廷兢業齋栗懼其隕顛纘武紹文疊慶重光克彰濬哲罔忝洪緒十有二葉二百有四載則我太祖權明號而建不拔鋪鴻名而垂永久類上帝以答嘉應享皇靈以酬景福曷有怠已越歲在癸丑冬十月癸酉文武孝德皇帝詔丞相臣植臣播臣元穎等與大將和蕃使禮部尚書論訥羅等會盟於京師壇于城之西郊坎于壇北凡讀誓刑牲加書復壤陟降周旋之禮動無違者蓋所以偃兵息人崇姻繼好懋建遠略規恢長利故也原夫昊穹上臨黃祗下載茫茫蠢蠢之類必資官司為厥宰臣苟無統紀則相滅絕中夏見管維唐是君西裔一方大蕃為主自今而後屏去兵革宿忿舊惡廓焉消除追崇舅甥曩昔結援邊堠撤警戍烽韜煙患難相恤暴掠不作亭障甌脫絕其交侵襟帶要害謹守如故彼無此詐此無彼虞嗚呼愛人為仁保境為信畏天為智事神為禮有一不至搆災于躬塞山崇崇河水湯湯日吉辰良奠其兩疆西為大蕃東實巨唐大臣執簡播告秋方大蕃贊普及宰相鉢闡布尚綺心兒等先寄盟文要節云:「漢兩邦各守見管本界彼此不得征不得討不得相為寇讎不得侵謀境土若有所疑或要捉生問事便給衣糧放還。」今並依從更無添改預盟之官十七人皆列名焉其劉元鼎等與論訥羅同赴吐蕃本國就盟仍敕元鼎到彼令宰相已下各於盟文後自書名靈武節度使李進誠於大石山下破吐蕃三千騎

78) [장경] 2(822) 2월에 사신을 보내 경계를 정할 것을 청했다. 6월에 다시 사신이 입조했다. 염주에서 주를 올려 말하기를, “토번의 천여 명이 영무의 영내로 들어와서 병사를 보내 쫓아내고 진출을 저지했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당항에 국서를 보내려던 토번인 150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같은 달에 유원정이 토번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와서 주를 올려 말하기를, “지난 424일에 토번 [찬보의] 아장(牙帳)에 도착했으며, 56일에 회맹을 마쳤습니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원정이 토번에 왕래할 때는 하주(河州)를 경유하였는데, 그 도원수(都元帥) 상서령 상기심아가 말하기를, “회흘은 작은 나라이다. 우리가 병신년에 대막(大漠)을 건너 정벌하려고 추격하였는데, 성곽에서 이틀거리에 다다랐을 때, 바로 정벌해도 될 정도였으나, 본국의 찬보가 승하하셨음을 듣고 귀환했다. 회흘의 약함이 이와 같은데, ()의 대우가 우리에게 하는 것보다 후하니 그것은 왜인가?”라고 하여, ()원정이 말하기를, “회흘은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었을 때 구해준 공훈이 있으며, 또한 일찍이 우리 국토를 조금도 침범하지 않았으니 어찌 후하게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때 ()원정이 왕래할 때는 황하의 상류를 건넜는데, 홍제교에서 서남으로 2천여 리이며, 그 물이 매우 얕고 강폭이 좁아서 봄이면 옷을 걷어 걸어서 건넜고, 가을과 여름이면 배를 타고 건넜다. 그 남쪽 3백여 리에 산이 세 개 있는데, 산의 모양이 세 발 달린 평평한 냄비 같았고, 황하의 근원이 그 사이에 있어 물이 매우 맑고 차가왔다. [그러나] 여러 물길을 거치면서 물의 색이 붉게 되고, 계속해서 여러 물줄기가 흘러들어 점차 황탁해진 것이다. 또한 [황하의] 근원에서 서쪽으로 토번 열관(列館: 객관)과의 거리는 대략 4()에 해당되었는데, 매 역은 약 2백여 리에 해당된다. [황하의 근원에서] 동북으로 가면 막하연적미에 이르는데 폭이 50리이며, 남쪽으로 점차 협소해지고, 북쪽으로는 사주(沙州)의 서쪽에 이른다. 이윽고 남쪽으로 토()혼국(吐渾國)으로 흘러들어가고, 이로부터 물줄기가 땅 밑으로 숨어들어, 예부터 이를 적미(磧尾)라고 했다. 이곳의 지리를 살펴보면, 대략 검남의 정서(正西)에 해당된다. 유원정이 처음 찬보를 민구로천에서 만났는데, [그곳은] 찬보의 하영지였고, 그 하천은 라사천(邏娑川:라싸천) 남쪽 백 리에서 장하(臧河)로 흘러들어갔다. 당시 토번이 사신 논실낙식 등을 보내 유원정을 따라 입조하여 사은하였는데, 태복소경 두재에게 명하여 토번에 사신으로 가서 답방하게 했다.

二年二月遣使來請定界六月復遣使來朝鹽州奏:「吐蕃千餘人入靈武界遣兵逐便邀截。」又言:「擒得與党項送書信吐蕃一百五十人。」是月劉元鼎自吐蕃使迴奏云:「去四月二十四日到吐蕃牙帳以五月六日會盟訖。」元鼎往來蕃中並路經河州見其都元帥尚書令尚綺心兒云:「迴紇小國也我以丙申年踰磧討逐去其城郭二日程計到即破滅矣會我聞本國有喪而還迴紇之弱如此而唐國待之厚於我何哉?」元鼎云:「迴紇於國家有救難之勳而又不曾侵奪分寸土地豈得不厚乎!」是時元鼎往來渡黃河上流在洪濟橋西南二千餘里其水極為淺狹春可揭涉秋夏則以船渡其南三百餘里有三山山形如河源在其間水甚清泠流經諸水色遂赤續為諸水所注漸既黃濁又其源西去蕃之列館約四驛每驛約二百餘里東北去莫賀延磧尾闊五十里向南漸狹小北自沙州之西乃南入吐渾國至此轉微故號磧尾計其地理當劍南之直西元鼎初見贊普於悶懼盧川蓋贊普夏衙之所其川在邏娑川南百里臧河之所流也時吐蕃遣使論悉諾息等隨元鼎來謝命太僕少卿杜載使以答之

79) [장경] 3(823) 정월에 사신 논답열이 와서 신년 인사를 했다.

[장경] 4(824) 9월에 사신을 보내 오대산도(五臺山圖)를 구했다.

10월에 이우(犛牛:야크) 및 은으로 주조한 서우(犀牛), , 사슴 각 하나씩을 바쳤다.

보력 원년(825) 3월에 사신 상기립열을 보내 입조했다. 또 강화를 청하였다. 9월에 광록경 이예를 사신으로 삼아 그에 답했다.

태화(太和) 5(831)에서 8(834) 사이에 사신을 보내 조공함이 끊이지 않으니, 우리 쪽에서도 역시 때때로 사신을 보내 이에 답했다.

개성 원년(836)2(837) 모두 사신이 왔다.

회창 2(842)에 찬보가 죽었다. 12월에 논찬(論贊) 등이 와서 상을 알리니, 조서를 내려 장작소감 이경으로 하여 제사지내게 했다.

대중 3(849) 봄에 재상 상공열이 동도절도사(검남동도절도사를 지칭한다)를 죽이고, (), (), 안락(安樂) 3개 주()와 석문(石門), 목협(木硤) 7개 관()으로 통호하기를 청하니, 경원절도사 강계영이 이를 듣고, 태복경 육탐에게 명하여 가서 일을 처리하게 했다. 그 해 7월에 하(), ()의 장로들이 나이 많고 적은 사람 천여 명을 데리고 경사(장안)에 이르니, 황상이 직접 연희루(延喜樓)에 납시어 그들을 보았다. 이에 환호하고 춤추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또한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리에서 모자와 허리띠를 서로 잡아당기니, 그 후에 황상이 명하여 좋은 곳을 선정하여 [이들을] 그곳에 살도록 했다. 보는 자들이 모두 기뻐하며 만세를 외쳤다. <구당서 토번전 끝>

三年正月遣使論答熱來朝賀四年九月遣使求五臺山圖十月貢犛牛及銀鑄成犀牛鹿各一寶曆元年三月遣使尚綺立熱來朝且請和好九月遣光祿卿李銳為使以答之大和五年至八年遣使朝貢不絕我亦時遣使報之開成元年二年皆遣使來會昌二年贊普卒十二月遣論贊等來告哀詔以將作少監李璟弔祭之大中三年春宰相尚恐熱殺東道節度使以秦安樂等三州并石門木硤等七關款塞涇原節度使康季榮以聞命太僕卿陸耽往勞焉其年七月隴耆老率長幼千餘人赴闕上御延喜樓觀之莫不歡呼忭舞更相解辮爭冠帶于康衢然後命善地以處之觀者咸稱萬歲

80) (史評:사평): 사관이 말하기를, “융적(戎狄)이 걱정거리가 됨은 이미 오래되지 않았는가! ()과 한()나라 이래, 서적이 아주 잘 갖춰져 있으니 거기에서 상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역사상 소강(小康)이 출현한 적은 아주 적었고, 군주도 항상 성현은 아니었으니, 내가 쇠약하면 상대가 성했고, 내가 성하면 상대가 쇠약했으며, 성하면 우리 도성 주변을 침범하고, 쇠약하면 우리의 위엄과 교화에 복종하였다. [융적을] 회유하는 도리와 미리 대비하는 방편에는, 유신(儒臣)은 화친을 많이 논의했고, 무장(武將)은 오직 싸움에 이기는 것을 기약하였으니, 이것이 [둘 사이의] 큰 차이였다. 저 토번은 서쪽 변경에 나라를 세우고, 여러 해에 걸쳐 인근 번국(蕃國)을 잠식하여 영토를 넓혔다. 고종 때, 국토가 만 리에 이르러 우리와 항쟁하며 겨루었다. 근래에는 전처럼 강성하지 않아 변경에서 저지하고 방어하는 정도에 이르니, 명령을 내려 출병함에, 서로 번갈아 진퇴하고, 혹은 이기고, 혹은 지니, 수고롭다고 하겠다. 유릉(幽陵)의 도적떼가 일어남에 이르러,(유주의 도적떼 즉, 안록산을 지칭한다.) 천자가 거처를 옮기니, 변경을 지키던 병사는 모두 중앙으로 돌아왔고, [이에] ()(), (: 청해 동쪽)을 잃으니, 이는 하늘이 [토번에] 잠시 빌려준 기회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경읍(京邑) 가까이까지 다가왔고, 때때로 군사를 동원해 노략질하니, 비록 매번 사신을 보내 옛 우호 관계로 다시 돌아가자고 하고, 옥백(玉帛)을 상국(上國) 당에 보냈지만, 봉수(烽燧)는 이미 근교에 이르렀으니, 은혜를 배반하고 언약을 저버리며, 예의를 무시하는 것을 가히 알 만하다. 무릇 신명(神明)으로 요체를 삼고, 성신(誠信)을 귀하게 여겨, 평량에서 회맹하였으나, 속이고 도모하기를 거듭하였으니, 또한 이는 충의와 신의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이적(夷狄)에게도 비록 군주는 있으나, 군주가 없는 제하(諸夏)보다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그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史臣曰戎狄之為患也久矣自秦漢已還載籍大備可得而詳也但世罕小康君無常聖我衰則彼盛我盛則彼衰盛則侵我郊圻衰則服我聲教懷柔之道備預之方儒臣多議於和親武將唯期於戰勝此其大較也彼吐蕃者西陲開國積有歲年蠶食鄰蕃以恢土宇高宗朝地方萬里與我抗衡近代以來莫之與盛至如式遏邊境命制出師一彼一此或勝或負可謂勞矣迨至幽陵盜起乘輿播遷戍卒咸歸湟失守此又天假之也自茲密邇京邑時縱寇掠雖每遣行人來修舊好玉帛纔至於上國烽燧已及於近郊背惠食言不顧禮義即可知也夫要以神明貴其誠信平涼之會畜其詐謀此又不可以忠信而御也孔子曰:「夷狄之有君不如諸夏之亡也。」誠哉是言

81) 찬하여 말한다. “서융의 땅에서는 토번이 가장 강했다. 주변국을 잠식하고 중국의 강역에 활개를 펼치니, 때로는 반란을 일으키고, 때로는 복속되었고, 혹은 움츠리고, 혹은 펼쳤다. 예의는 비록 갖추었으나 그 본성은 시랑(豺狼)과 같았다.”

贊曰西戎之地吐蕃是強蠶食隣國鷹揚漢疆乍叛乍服或弛或張禮義雖攝其心豺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