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4의 착오
제4의 착오는 옛 사서를 읽을 때에 앞뒤의 문례(文例: 문장을 짓거나 쓰는 방법의 실제 예)를 모르고
자구(字句)의 글 뜻을 억측 해석하여
위증한 기록을 발견할 기회를 없게 함이다.
이를테면,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의 주(註)에 “응소가 말하기를 (험독은) 조선왕 만의 도읍이다.
강물의 험준함을 의지하고 있으므로 험독이라고 하였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동쪽에 있다. 이곳이 본래부터 험독이다.
사고(안사고)가 말하기를 찬(신찬)의 설이 옿다
(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의
차(此: 이곳)는 요동군 험독의 대명사니,
본(本) 주(註)가 요약한 뜻을 상세히 풀이하면,
응소가 요동군의 험독을 조선왕 만의 옛 도읍인 왕검성이라 주장하매,
신찬이 이를 반대하여 가로되(왈,曰)
왕검성 조선왕 만의 옛 도읍지는 요동군에 있지 않고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 것이니,
차(此:이) 요동군의 험독은 저 왕검성과 관계없이 따로 있는 험독이라 하여
응소와 신찬 양씨의 설(說)이 서로 반대의 견지에 있으므로
안사고가 응소의 설(說)을 버리고 신찬의 설(說)을 취하여
“찬의 설이 옳다(찬설시야)”의 단안을 내림이니,
그 글의 뜻이 십분 명백할뿐더러,
또 지리지의 각군 각현 주(註)에 의거하여 볼지라도,
가령 금성(金城)의 주(註)에 응설(應說-응소의 설)에는
“성을 쌓다가 쇠(金)를 얻은 고로 금성(金城)이라 명하였다”하고,
찬설(瓚說: 신찬의 설)에는 “쇠(金)의 견고함의 뜻을 취하여 금성(金城)이라 명하였다.” 하여
응설과 신찬의 금성(金城)에 대한 해석이 서로 반대되매
안사고가 “찬의 설이 옳다(찬설시야,瓚説是也)”의 단안을 내리며,
영구(靈丘)의 주(註)에
응설(應說)에는 “조무령왕(趙武寧王)의 장지(葬地)인 고로 영구(靈丘)라 하였다”하고
찬설(瓚說)에는 “무령왕 이전부터 영구(靈丘)의 이름이 있었다” 하여
응설과 신찬의 영구(靈丘)에 대한 양설의 해석이 서로 반대되매
사고가 “찬의 설이 옳다(찬설시야,瓚説是也)”의 단안을 내리며,
기타 임진(臨晉), 순읍(栒邑), 진양(晉陽), 포반(浦反), 수무(脩武), 양(梁), 위씨(尉氏) 등
수십 현의 주(註)가 다 이와 같이 응소 신찬 양설이 반대되는 경우라야,
“응설이 옳다(응설시야,應説是也)”라 하거나 “찬설이 옳다(찬설시야,瓚説是也)”라 하는
양설의 하나를 취하는 단안을 내렸거니와,
만일 응설과 찬설이 독립적으로 옳거나
찬설이 응설을 따르면서 옳으면,
비록 단안이 없을지라도 그 옳음이 저절로 드러나므로
번잡한 문장을 피하여
그런 경우에는 응설시야 혹 찬설시야란 어구가 없음이니,
이는 지리지(地理志)를 한번 보면 밝고 또렷하게
깨달아 아는 문례(文例)이다.
전술(前述)한 바 요동군 험독의 주(註)도
신찬이
본(本) 험독을 왕검성이라 주장하는 응소를 반대하여
왕검성은 낙랑군의 속현이요 이 요동군 험독과는 관계없다는 이의(異議)를 제기하였으므로
안사고가 그 이의를 찬성하여 찬설시야라 함이니,
그 전후의 문례(文例)에 의하여 그 글의 뜻이 더욱 명백하거늘
선배유학자들이 지리지의 문례(文例)를 잘 알지 못하고
또 험독 주(註)의 글 뜻을 잘못 풀어
차자시험독(此自是險瀆)의 차(此)를 왕검성의 대명사로 보며, 찬설을 응설의 찬성설로 알아
그 전문(全文)을
응소가 가로되 “험독은 조선왕 만의 고도(古都) 왕검성이라”하매
신찬은 이를 찬성하여 가로되 “왕검성 곧 조선왕 만의 고도(古都)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으니 이(차,此) 왕검성은 곧 요동군의 험독이라” 하고,
사고는 또 신찬의 찬성설을 찬성하여 가로되 “신찬의 말이 맞다(찬설이 시야)”라고 한 것으로 해석하였으니,
이러한 해석은 전후의 문례(文例)에 맞지 않을뿐더러,
또는 험독현이 요동군의 속현인 동시에 낙랑군의 속현도 되며,
요동군이 곧 낙랑군인 동시에 낙랑군이 곧 요동군이라는 미치광이의 해석이 되니,
이는 위 아래 글의 뜻만 모순이 될 뿐 아니라
곧 같은 모양, 같은 이름, 같은 위치의 성읍(城邑)이 한 곳에 두 개가 같이 있고
같은 시간, 같은 땅, 같은 사실의 역사가
하나의 선에 두개가 같이 일어나서
필경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알수 없는
비지리(非地理)의 지리, 비역사(非歷史)의 역사가 됨이 아니냐.
여러 선생의 정밀하고 박식한 학식으로 이같은 대 착오가 있음은 참으로 몹시 놀랄만한 일이며,
더구나 신찬의 본 뜻은
왕검성인 평양을 요동군 이동(以東)의 낙랑군 평안도에 있다고 주장하는 제선생의 의견과 틀림이 없거늘
여러 선생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신찬의 설을 오해하였으므로
이를 자기들의 평안도 평양설을 반대하는 요동평양설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동사문답, 아방강역고, 해동역사 지리고 등 각각의 책들에
모두 평안도 평양을 주장하는 동시에
신찬의 설을 “망령된 주장을 하고 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천하의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냐.
이상 네개의 착오를 발견하는 동시에 모든 서적의 위증이 다 파괴되고
모든 학자의 잘못된 고찰과 잘못된 증명이 다 바르게 잡혀
평안도의 대동강과 지금 평양을 고(古)평양 고(古)패수로 잡던 망설(妄說: 망령된 설)들은
자연 그 근거를 잃고
봉천성(奉天省: 지금의 요녕성)의 해성현(海城縣: 지금의 해성시)과 헌우란(蓒芋灤)이 고(古)평양, 고(古)패수인 확증을 얻어
이에 조선문명의 발원지인 고(古) 3경(京)의 하나인 평양과 7대 강의 하나인 패수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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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조선사연구초(인터넷 판 - 위키문헌)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2%AC_%EC%97%B0%EA%B5%AC_%EC%B4%88
2) 참고문헌: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
3) 지금 올리는 ‘평양패수고’는 ‘조선사연구초’ 안에 있는 글임
* 조선사 연구 초(朝鮮史硏究草), <저자: 신채호>
가. 고사상(古史上) 이두문 명사 해석법
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동서(東西) 양자(兩字)의 상환(相換) 고증(考證)
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라. 평양 패수고
마. 전후 삼한고(前後 三韓考)
바. 조선역사상 일(一)천년래 제일 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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