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결론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중고(中古)시대의 평양 패수는 남과 북에 나뉘어 있었으니
남쪽에 있는 것은 낙랑국이라, 평양성이라 칭하여 그 위치가 대동강상에 고정되어 있었고
북쪽 있는 것은 낙랑군이라 칭하여 그 군(郡)을 다스리던 곳이 요동부터 요서,
요서부터 상곡까지 이동하였던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남낙랑(南樂浪)에는 중국인의 세력이 중고(中古)시대에 아주 들어온 적이 없느냐.
이는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중고(中古)시대에 조선인은
지금의 조선 8도 이외에 압록강을 건너
흥경(현재 요녕성 신빈 만주족 자치현 서쪽) 이동(以東),
개원(현재 요녕성 개원시) 이북의 봉천(지금의 요녕성),
길림의 대부분에 뿌리내려 살고 있으면서,
지금의 만리장성 이북으로 나가 열하도(熱河道), 흥화도(興和道), 수원도(綏遠道) 등을
진격하는 지방으로 삼아
세력이 왕성할 때에는 남하하여
어양(漁陽: 북경 부근), 우북평(右北平: 영평부-永平部), 태원(太原: 대동부-大同府) 등을 공격하고,
중국인은 영평부 부터 산해관으로 진격의 지방을 삼아 세력이 왕성하면 요동부터
혹 흥경(興京) 이동(以東)도 틈을 엿봐, 혹 살수 이남까지도 침략하였거늘
역대의 사가(史家)들이 매번 이런 줄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므로
삼국사기를 읽을 때 고구려가 요서에 축성하였다, 어양, 상곡, 우북평 등에 침입하였다는 말을 보면
고구려가 열하도, 흥화도 등지부터 남향하여 영평부 혹 대동부 등을 공격한 것인 줄을 모르고
산해관부터 서진(西進)하여 영평부 혹 대동부 등을 공격함인 줄로 알며
중국인의 세력이 미천왕 이전, 수백년 동안 평안 황해 등지에 기반을 다지고 살았던 줄로 아니,
이따위는 다 비상한 착오라.
설혹 평안 황해에 1,2차 중국인의 병화(兵禍: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입은 일이 있다 할지라도
이 또한 고려말 홍건적이 개성에 침입하듯이 잠시 쳐들어와 요란을 피운 것이 될 뿐이니
영구한 점령지로 있었다 함은 역사적 기록과 틀리는 망설(妄說: 망령된 주장)이라 할 것이다.
다만 낙랑이 이리저리 옮긴 것에 대하여 일종 재미를 느낄 일이 있으니,
낙랑이 요서로 옮길 때는 조선의 세력이 요동에 미친 뒤며,
낙랑이 상곡으로 옮길 때는 조선의 세력이 요서에 미친 뒤니,
낙랑 위치의 진퇴로 조선의 세력이 커지고 줄어듦을 점칠 수 있을 것이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많은 낙랑과 대방의 고분들을 기재하였으나,
낙랑군 제8 대동강 방면의 고분을 중국 한나라 고분이라 함은
구리거울이나 금구(金口: 금고-金鼓라고도 하는데 금속으로 만든 징 같이 납작한 둥근 북)
등에 박힌 왕(王) 자(字)를 제왕의 왕으로 풀지 않고
중국 왕서방의 왕씨로 풀며,
제 6, 제 5 강동(江東)의 고릉(古陵)은 전설에 황제총(皇帝塚)이라 하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를 고구려 동천왕릉이라 하였거늘,
이제 중국 한나라의 왕릉이란 전에 없던 별명을 주며,
점제비는 그 맨 앞 빠진 부분에 의문부호를 표시하고 중국 한나라 광화(光和) 원년이라 하니,
우리 같은 고고학의 문외한이 어찌 그 시비를 경솔히 논하리요마는,
그러나 그 그림 설명의 대개를 보건대 어떤 말은 학자의 견지에서 나왔다느니보다
정치상 다른 종류의 작용이 적지 않은 듯하다.
대방태수 어양(漁陽) 장무이(張撫夷)의 묘는 그 비문의 어양(漁陽) 2자(字)를 근거하여
중국 북경인이 관리가 된 자(者)의 묘라 하였으나,
백제 중엽부터 백제인이 중국을 모방하여 지은 지명이 많으니
광양(廣陽), 성양(城陽) 등이 그것이니,
어양도 이와 같이 백제 안쪽 땅의 지명이 아닌지 모를지며,
개로왕때에 대방태수 사마(司馬) 장무(張茂)란 자(者)가 있으니
장씨는 백제의 대대로 세력있는 집안으로 대방태수의 직(職)을 세습하던 성씨인지도 모를지니,
당연히 북경인이라 단언함은 너무 급조한 일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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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로써 단재선생의 '평양 패수고'가 끝났습니다.
1) 출처: 조선사연구초(인터넷 판 - 위키문헌)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2%AC_%EC%97%B0%EA%B5%AC_%EC%B4%88
2) 참고문헌: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
3) 지금 올리는 ‘평양패수고’는 ‘조선사연구초’ 안에 있는 글임
* 조선사 연구 초(朝鮮史硏究草), <저자: 신채호>
가. 고사상(古史上) 이두문 명사 해석법
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동서(東西) 양자(兩字)의 상환(相換) 고증(考證)
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라. 평양 패수고
마. 전후 삼한고(前後 三韓考)
바. 조선역사상 일(一)천년래 제일 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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