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년 (AD 57) : 탈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탈해를] 또는 토해(吐解)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때 나이는 62세였다. 성은 석(昔)씨이고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앞서 그 나라 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이 되어 큰 알을 낳았다.
그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 여자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맡겨두었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금관국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다다랐다. 이때는 시조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지 39년 되는 해이다.
그때 바닷가에 있던 할멈이 줄로 끌어 당겨서 해안에 매어놓고 궤짝을 열어 보니 작은 아기가 하나 있어 그 할멈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신장이 아홉 자나 되고 풍채가 빼어나고 환했으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 아이의 성씨를 모르니, 처음에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면서 그것을 따랐으므로 마땅히 작(鵲)에서
[조(鳥)를] 생략하여 석(昔)으로써 성을 삼고, 또 궤짝에 넣어둔 것을 열고 나왔으므로 마땅히 탈해(脫解)라 해야 한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를 업(業)으로 하여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한 번도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骨相)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하여 공명을 세워라."고 하였다.
이에 오로지 학문에만 힘써 지리(地理)까지도 겸하여 알았다.
양산 아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그곳을 빼앗아 살았는데,
그 땅은 후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남해왕 5년에 이르러 [왕이]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7년에는 등용하여 대보(大輔)로 삼아
정치의 일을 맡겼다.
유리왕이 장차 죽을 즈음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왕(先王)이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이나 사위를 논하지 말고 나이가 많고 또한 어진 사람으로 왕위를 잇게 하라!'고 하셨으므로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 마땅히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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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saki?kind=b
2. 해설과 분석
1) 신라 왕가(王家)의 두 번째 성씨인 석씨의 시조 석탈해에 관한 기록입니다.
2) 석탈해는 시조 박혁거세 때 태어났다는 점이 중요합니다.(박혁거세 재위 39년 되는 해)
그리고 2대 임금인‘남해’때 벌써 어질다는 소문이 나서 임금의 사위가 되고
나중에 재상으로서는 최고의 지위인 대보에 올라 신라 정치를 맡아 처리한 사람입니다.
남해 임금(왕호-차차웅)이 죽자 임금이 된 유리와 석탈해가 왕위를 놓고 서로 양보하다가
석탈해가 양보하여 유리가 먼저 임금(이사금)이 되고 유리가 죽자 임금 자리를 석탈해에게 넘긴 것입니다.
3) 금관국(金官國)은 지금의 김해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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