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74,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19, 8. 황소의 난-45)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74,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19, 8. 황소의 난-45)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8. 황소의 난
1) 연표(자치통감 요약을 기초로 작성)
2) 해설
2) 해설 – 25
< 황소의 난을 전후로 한 주요 인물의 행적 >
3. 이극용-1
878년 2월~ 이극용의 출현과 사타족의 난
880년 1월 사타가 안문관에 들어와서 흔주와 대주를 약탈함(1월)
880년 2월 사타의 2만여 명이 진양을 압박하고(2월26일), 태곡(太谷)을 함락시켰다.(27일),
여주 방어사 제갈상을 파견하여 하동을 구원케 함 하동절도사 강전규는 소홍진 을 파견하여 진성(秦城)에서 싸웠으나
패하여 돌아와 참수하였다. 사타는 이미 대북(代北)으로 돌아감
880년 6월 울,삭주(州) 도통 이탁과 노룡절도사 이가거, 토곡혼 혁련탁이 함께 사타족 토벌
사타족 이극용은 고문집을 파견하여 삭주(朔州)를 지키게 하고, 무리를 거느리 고 이가거를 웅무군에서 막았다.
880년 7월 이국창 이극용 부자 도주(사타족의 난 진압). 사타족 이극용은 웅무군(雄武軍)에서 회군, 고문집을 삭주에서 치니
노룡절도사 이가거가 한현소를 파견하여 약아령(藥兒嶺)에서 이극용군을 대파, 7천여 명을 죽이고,
이진충· 정회신 모두 전사함. 이극용이 웅무군 경계에서 다시 노룡군 (軍)에 패배, 전사 1만. 이국창은 울주(蔚州)에서
이탁· 토욕혼 혁련탁에 패하 여, 사타군이 모두 무너짐
이국창·이극용 부자(父子). 사타 종족들과 북쪽 달단 (達靼.타타르)로 도주(7月)
달단(達靼)은 말갈(靺羯)의 별부로 하투지역 음산(陰山)에 살았다:
881년 3월 이극용의 재등장 이우금이 자기 형의 부자(이국창 이극용 부자)를 사면하여
황소군을 치게 해달라고 진경사(감군-환관)에게 건의하여 이극용이 사면받고, 달단의 여러 부족 1만 명을 인솔하여 대주로 왔다.
881년 5월 이극용이 군사 5만으로. 진양에 도착하여 군대에게 줄 상을 내라고 요구하니
하동절도사 정종당은 전(錢) 1천민, 쌀 1천곡을 주었다(5월16일)
이극용이 진양을 약탈하고 뒤이어 양곡과 유차도 약탈하고 돌아감(5월17일)
881년 6월? 이극용이 흔주와· 대주를 함락하고 대주에 주둔.
882년 2월 사타족 이극용이 울주 약탈.
882년 4월 대동방어사 혁련탁과 노룡절도사 이가거가 이극용에게 패함.
882년 10월 이극용이 흔주와 대주 점거하고, 병주와 분주를 침략하여 누번 감과 전투
평로대장 왕경무를 평로유후로 삼았다. 이때 여러 도의 군사들은 모두 관중에 모여 황소를 토벌하였는데
평로만 오지 않았는데 장준의 설득으로 왕경무도 관중으로 갔다.
882년 10월 황소의 세력이 강하자 이극용을 부름.
882년 11월 이극용이 사타 1만7천군을 거느리고 남과 석 거쳐 하중으로 남하
882년 12월 하동절도사 정종당이 이극용에 붙었던, 남주자사 탕군을 붙잡아 참수. 혼주와 대주의 유후인 이극용을 안문절도사로 삼았다.
882년 12월 이극용이 4만 군사를 거느리고 하중에 도착하여 동생 이극수를 파견하여 황하를 건너 황소군을 시험하게 하였다.
이극용의 군대가 도착하자 황소의 군대는 이를 꺼려 황소가 승려 10여명을 파견 하여 이극용에게 화의를 요구하였으나
이극용은 이를 거절하고 군사를 이끌고 하양에서 황하를 건너 동주에 진을 쳤다.
883년 1월2일 이극용의 장수 이존정이 황소의 동생 황규를 사원에서 패배시키고 이극용이 사원에 주둔.
이극용을 동북면행영도통으로 삼았다.
883년 2월16일 이극용이 건갱으로 나가 진을 치고 하중, 의무, 충무 군과 합류하고,
양전피에서, 상양(항소군의 재상)의 15만 군을 대파, 시체가 30리에 널림
883년 2월27일 이극용이 화주 포위하니 황사업과 황규가 굳게 지켜 이극용은 기병을 나누어 위수 북쪽에 주둔.
883년 3월 6일 황소의 군사들은 자주패하고 먹을 것도 없어지니 속으로 도망갈 계책을 세워 군사 3만으로 남전으로 가는 길을 꽉잡고
상양을 파견하여 화주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이극용과 왕중영이 영구에서 이를 격파.
이극용은 위교에 진을 치고 그의 장수 설지훈과 강군립으로 하여금 장안으로 들어가
불지르고 적들의 목을 베어 돌아오게 하니 황소군은 크게 놀랐다.
883년 3월27일 이극용 등이 화주를 뽑으니 황규가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883년 4월4일 이극용이 충무장수 방종과 하중 장수 백지천 등과 더불어. 위수 남쪽에서 황소군을 하루에 세 번 연파,
의성과 의무군이 합세하자 황소군 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