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6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10, 8. 황소의 난-36)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6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10, 8. 황소의 난-36)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8. 황소의 난
1) 연표(자치통감 요약을 기초로 작성)
2) 해설
2) 해설 – 16
< 883년 >
○ 장안 방면에서의 전투
이극용의 장수 이존정이 황소의 동생 황규를 사원에서 패배시키고 이극용이 사원에 주둔하였다.(1월2일).
◎ 이극용, 동북면행영도통으로(883년 1월2일)
이극용을 동북면행영도통으로 삼았다.
이극용이 건갱으로 나가 진을 치고 하중, 의무, 충무 군(軍)과 합류하여 양전피에서, 황소군의 태위 상양의 15만 군을 대파하여, 시체가 30리에 널렸다.(2월16일)
황소의 장수 왕번과 황규는 화주를 습격하여 재점거하였다.
이극용이 화주를 포위하니 황사업과 황규가 굳게 지켜 이극용은 기병을 나누어 위수 북쪽에 주둔하였다.(2월27일)
황소의 군사들은 자주 패하고 먹을 것도 없어지니 속으로 도망갈 계책을 세워 군사 3만으로 남전으로 가는 길을 꽉잡고
상양을 파견하여 화주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이극용과 하중절도사 왕중영이 영구에서 이를 격파함.(3월6일)
이극용은 위교에 진을 치고 그의 장수 설지훈과 강군립으로 하여금 장안으로 들어가 불지르고 적들의 목을 베어 돌아오게 하니 황소군은 크게 놀랐다.
◎ 양행밀의 등장(883년 3월): 본명 양행민(楊行愍, 886년 개명),
회남 압아 합비 사람 양행민을 여주자사로 삼았다.
양행민은 본래 여주의 아장이었는데 용감하여 누차 전공을 세우자 도장이 이를꺼려 여주자사 낭유복에게 보고하여 내 보내어 밖에서 수자리를 서게 하였다.
양행민이 가면서 인사를 하니 도장이 그에게 필요한 것을 물으니 양행민이 너의 목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목을 베고 스,스로 팔영도지병마사라고 하였다.
여주자사 낭유복은 통제할 수 없어서 고병에게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고병이 양행민을 회남압아로 삼아 지여주자사로 하니 조정에서는 그 때문에 그를 여주자사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여주자사 양행민이 요망한 방사 여용지의 꾐에 빠진, 회남군(軍)의 유공초와 요귀례를, 여주 신현에서 습격하여 몰살시킴
◎ 주전충, 선무절도사로(883년 3월23일)
하중행영초토부사 주전충을 선무절도사로 삼아 장안에서 이기고 수복하기를 기다렸다가
진(선무절도)으로 가게 하였다(3월23일).
○ 장안 방면의 전투에서는.......
이극용 등이 화주를 뽑으니 황규가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3월27일)
◎ 이극용 황소군 연파, 황소 장안 탈출(883년 4월4일)
이극용이 충무장수 방종과 하중 장수 백지천 등과 더불어. 위수 남쪽에서 황소군을 하루에 세 번 연파하고
의성과 의무군(軍)이 합세하자 황소군이 장안을 버리고 도주하였다.(4월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