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24,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69, 7. 남조의 침공-36)

상 상 2017. 5. 19. 17:21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24,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69, 7. 남조의 침공-36)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2) 해설(남조의 침공)

 

 

2) 남조의 침공(해설)- 5

< 868>

 

이렇게 대략 안남이 평정된 가운데 남조가 안남을 침공할 때 군사 교대 때문에 생긴 문제로 또다시 민란이 일어난다. 이른바 방훈의 난이다.

 

방훈의 난(8687~86910)

애초에 남조가 안남을 함락시키자(863) 서사(徐泗.철폐된 무녕절도)에게 군사 2천을 모집하여 원조하게 하였는데, 8백명을 별도로 계주(桂州)를 지키게 하며 3년마다 교체하기로 약정. 계주를 지키던 사람들은 이미 6년이 되어 누차 교대 요청했으나, 서사관찰사 최언증은 재정부족하다고 1년 더 머물게 하였다. 옛 서주(徐州: 옛 무녕절도)의 도적떼였던 도우후 허길, 군교, 조가립, 요주, 장행실 등은 계관관찰사가 교체되는 틈을 이용하여 7월에 반란을 일으켜 도장 왕종보를 죽이고 양료판관 방훈을 추대하여 주군으로 삼고 무기를 겁탈하여 지나는 곳을 약탈하였다.

 

당 조정은 장경사를 파견하여 그들의 죄를 사면하고 전부 서주(徐州)로 돌려보내니,

수졸들은 마침내 약탈을 중지하였다.(8)

 

정해절도사였던 고병을 우금오대장군으로 삼았다. 고병이 교지를 진입하게 해 달라고 청하여 당 의종은 이를 좆았다.(8)

 

방훈은 거짓으로 서사관찰사 최언증이 서주를 잘라 없애 달라는 표문을 쓴 것처럼 하고

또 거짓 조서로 그렇게 청한대로 하라고 한 것처럼 꾸며 경내 사람에게 퍼뜨렸다.

이에 서주사람들은 이를 믿고 모두 조정을 원망하였다.

 

방훈이 병사를 모집하자, 아비는 아들을 보내고, 처는 남편을 보내 응모하였다.

이웃 도에서는 방훈이 서주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요해처를 점거하니,

관군은 적어지고 반란군은 날로 많아져 관군은 자주 이기지 못하였다.

 

주야적심(이국창: 이극용의 아버지)의 재등장

당은 강승훈을 의성절도사 서주행영초토사로 삼고, 왕안권을 서주북면행영초토사로 삼고, 대가사를 서주남면행영초토사로 삼아 여러 도의 군사를 크게 발동하여 세 장수에게 예속시켰다. 강승훈은 사타(沙陀) 세 부락의 사자인 주야적심(이국창: 이극용의 아버지)과 토욕혼, 달단, 글필을 따르게 하였다.

 

강승훈은 신흥에 진을 쳤다가 1만이라 중과부족으로 송주로 후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