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상 소윤 이사망의 건의에 따라 이사망을 수주자사로 삼고 정변군절도사에 충임하여 미(眉), 촉(蜀), 공(邛), 아(雅), 가(嘉), 여(黎) 등의 주 관찰사로 하면서 만족들을 통합하여 진압하고 아울러 통령제도행영 제치등사로 하였다(868년6월) 사실은 이사망이 당 조정을 속인 것이다. ◎ 방훈의 난(龐勛之變.868年7月~869年10月) 애초에 남조가 안남(安南)을 함락시키자(863) 서사(徐泗.철폐된 무녕절도)에게 군사 2천을 모집하여 원조하게 하였는데, 8백명을 별도로 계주(桂州)를 지키게 하며 3년마다 교체하기로 약정. 계주를 지키던 사람들은 이미 6년이 되어 누차 교대 요청했으나, 서사관찰사 최언증은 재정부족하다고 1년 더 머물게 함. 옛 서주(徐州: 옛 무녕절도)의 도적떼였던 도우후 허길, 군교, 조가립, 요주, 장행실 등은 계관관찰사가 교체되는 틈을 이용하여 7월에 반란을 일으켜 도장 왕종보를 죽이고 양료판관 방훈을 추대하여 주군으로 삼고 무기를 겁탈하여 지나는 곳을 약탈 함 당 조정은 장경사를 파견하여 그들의 죄를 사면하고 전부 서주(徐州)로 돌려보내니, 수졸들은 마침내 약탈을 중지하였다.(8월) 정해절도사였던 고병을 우금오대장군으로 삼았다. 고병은 교지를 진입하게 해 달라고 청하여 당 의종은 이를 좆았다.(8월) 산남동도절도사 노탐을 서천절도사로 삼았다(9월8일) 방훈 등이 호남(湖南)에 도착하자 감군이 그를 유혹하여 그의 갑병을 모두 보내게 하였다. 산남동도절도사 최현이 군사를 엄히 하여 서주의 병사들은 경계에 못 들어가고, 배타고 장강을 따라 동으로 내려갔다.(9月) 서주에 도착하면 죽을 것을 우려, 각기 사재털어 무기 장착. 절서(浙西)를 지나 회남(淮南)으로 들어가니 회남절도사 영호도가 위로하고 물과 살을 주었다. 그의 도압아 이상이 폭도를 진압하자고 하였으나 영호도는 겁이나고 칙서도 없어 그들을 지나가게 허락하였다. 방훈은 은도(銀刀) 등을 불러 모아 숨기고, 여러 망명한 사람들을 배안에 숨겨 1천명에 이르렀으며. 9월 27일 사주에 도착하니, 자사 두도가 구장에서 향응을 베풀고 배우들로 하여금 즐겁게 하니 사주의 병졸들은 자기들을 놀리는 것으로 생각하여 배우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여 앉아있던 사람들은 놀라 흩어졌다 9월27일 서성(徐城)에 이르러 방훈과 허길 등이 무리를 선동 10월4일 사자가 팽성에 도착하니 서사관찰사 최언중이 그를 잡아 상황을 알아내고 가두었다. 10월7일 방훈이 채중을 통하여 최언중에게 상황을 신고 서사관찰사 최언중이 수하 장수들을 불러 물으니 계주의 수졸들을 성으로 들어오게 하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공격하자고 하였다. 이에 최언중이 결정을 못하니 온정호가 다시 건의하여 최언중은 마침내 성내 군사 4천3백명 중 3천명을 도우후 원밀 등에게 주어 방훈을 토벌케 함. 이어서 숙주에도 명령을 내려 부리로 군사를 충동하게 하고 사주의 군사는 홍에서 맞게 하였다. 10월8일 원밀이 팽성을 출발, 임산(任山)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방훈군이 관사(館舍)에 들어가기를 기다려 이들을 치려고 하였는데, 방훈군이 알아채고 후퇴(9日) 방훈군은 부리(苻離)에 도착. 수수(濉水)에서 싸워 승리하고 숙주에 도착하였는데 성 안에는 남은 군사가 없어 숙주 함락(10月10日). 방훈군이 재화를 풀어 수천명을 군사로 챙겨 방훈은 스스로 병마유후라고 하였다. 원밀이 성을 포위하려 하였는데 큰 바람이 불자 방훈군이 불화살을 쏘아 근 300명을 죽였다.(10월12일) 또한 방훈군은 밤에 성 안에 있는 큰 배 3백척에 물자와 양식을 싣고, 물길을 따라 내려갔다. 다음날 원밀군이 쫓아오자 방훈군은 배를 정박시키고 배에 1천명을 매복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비탈로 도망하였다. 원밀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군사를 풀어 그들을 쫓았는데 방훈군이 배와 비탈 양쪽에서 협공하여 원밀군을 대파하였다. 원밀 등이 달아나다가 하관에 빠지자 방훈군이 원밀군의 제장과 감진책사 모두를 죽이니 군사는 1천이고 나머지는 모두 항복하였다(10월13일) 15일에 방훈은 군사를 이끌고 수수(濉水)를 건너 팽성으로 향함. 서사관찰사 최언중은 그날 저녁 원밀이 패한 것을 알고 이웃 도에 구원을 요청하고 다음날 성문을 닫고 장정을 선발하여 수비하게 하였는데 어떤 자가 연주로 달아나기를 권고하자 결사항전을 외치고 그의 목을 베었다(10월16일) 17일 방훈군이 팽성(彭城)에 도착하여 무리 6천~7천이 공격하니, 얼마 않지나 나성에서 승리하여 최언중은 내성을 지켰는데 백성들이 방훈군을 도와 불을 질러 함락시킴(10月17日). 그날로 방훈군에 붙어 좆는 사람이 1만여 명이었다. 방훈이 당 조정에 절도사를 요구하고, 허길을 도우후로, 조가립을 도유혁사로 삼으며 무리들을 각기 아직에 보임하여 여러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 또 옛날 장수 유행급을 파견하여 1천5백명을 거느리고 호주(濠州)에 주둔케하고 이원은 2천명을 거느리고 사주(泗州)에 주둔하게 하며, 양비는 1천명을 거느리고 숙주(宿州)에 주둔하게 하고 나머지 각 요해처에 군 배치(10月20日) 서주(徐州) 백성들 정책헌상 폭주, 사방의 도적들 귀부해와, 10일사이에 서주(徐州)의 쌀1말 값이 2백전이 되었다 방훈은 거짓으로 서사관찰사 최언증이 서주를 잘라 없애 달라는 표문을 쓴 것처럼 하고 또 거짓 조서로 그렇게 청한대로 하라고 한 것처럼 꾸며 경내 사람에게 퍼뜨렸다. 이에 서주사람들은 이를 믿고 모두 조정을 원망하였다. 방훈군의 유행급이 호주(濠州)를 점령하여 자사 노망회를 가두고 스스로 행자사사가 되었다. 방훈군의 이원이 사주에 도착하여 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여 방훈이 이원을 도와 1만여 명으로 공격하였으나 실패 방훈이 병사를 모집하자, 아비는 아들을 보내고, 처는 남편을 보내 응모하였다. 이웃 도에서는 방훈이 서주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요해처를 점거하니, 관군은 적어지고 반란군은 날로 많아져 관군은 자주 이기지 못하였다. 방훈군은 어대(魚臺) 근처의 10개 현을 격파함.(11月) 송주 동쪽 마산(磨山)으로 도망친 백성들 포위, 가뭄에 샘이 말라 백성 수만명 모두 목말라죽음. 칙사가 도착하였는데 절도사로 삼는다는 말이 없었다(11月14日) 당은 강승훈을 의성절도사 서주행영초토사로 삼고 왕안권을 서주북면행영초토사로 삼고 대가사를 서주남면행영초토사로 삼아 여러 도의 군사를 크게 발동하여 세 장수에게 예속시켰다. 강승훈은 사타(沙陀) 세 부락의 사자인 주야적심과 토욕혼(吐谷渾), 달단(達靼.타타르), 글필(契苾)을 따르게 하였다. 방훈은 이원을 대신하여 오형을 파견. 다시 사주(泗州)를 맹공격(11月17日). 회남(淮南)의 5백군(軍)이 구원와 패주(20日) 방훈은 그의 장수 유길을 파견하여 정예 군사 수천으로 오형이 사주를 공격하는 것을 돕게하고, 유행급은 왕홍립을 파견하여 사주(泗州)로 증파. 진해(鎭海.절서)절도사 두심권이 적행양을 파견하여 4천명을 거느리고 사주를 구원케 하였는데(29일) 적행약이 군사를 이끌고 사주에 도착하자 방훈군이 포위하여 몰살시킴(30일) 이보다 먼저 회남절도사 영도호가 이상을 파견하여 군사 수천으로 사주를 구원하는데 곽후본, 원공변과 군사를 합하여 도량성에 주둔하여 회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았다. 방훈군이 적행약을 이긴 기세로 그들을 포위 12월 5일 드디어 도량성을 함락시키고 이상과 곽후본을 서주로 호송하였으며 회구(淮口)를 점거하니, 조운과 역참의 길이 끊어졌다. 강승훈은 신흥에 진을 쳤다가 1만이라 중과부족으로 송주로 후퇴 방훈은 정실종 등을 파견, 남으로 서(舒), 여(廬)를 노략질하고, 북으로 기(沂), 해(海)를 공격하여 술양(沭陽), 하채(下蔡), 오강(烏江), 소현(巢)을 격파하고, 저주(滁州)를 함락시키며, 자사 고석망을 죽였다. 또 화주를 침공하니 자사 최옹이 사자를 파견하여 그들을 대접하고 아끼는 두 자제를 온전하게 해 달라고 빌며 그 나머지는 방훈군에게 처리하게 하였다. 이에 방훈군은 성 안을 크게 약탈하고 사졸 800명을 죽였다. 서주에서는 원병과 식량이 끊어져 사람들은 묽은 죽을 먹었다. 서주에서 신당의 결사대가 윤12월 10일에 출발하여 방훈군의 수채를 찍고 14일에 양주에 도착하여 회남절도사 영호도를 만나보고 15일에 윤주에 이르러 진해절도사 두심권에게 구원을 요청 함. 이에 진해절도사 두심권이 압아 조익을 파견하여 2천 명을 거느리고 회남과 더불어 쌀 5천곡과 소금 5백곡을 운반하여 사주를 구원케 하였다(윤12월15일) 서주남면행영초토가 대가사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회하를 건너 싸우며 전진하니 방훈군은 회남의 수비를 다 버렸다. 대가사가 회구를 탈취하고 도량성을 포위하니 다음날 아침 방훈군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대가사는 승리해 대비를 하지 않았는데 방훈군의 왕흥립이 습격하여 몰살당하고 대가사와 감군 장교들의 수급을 팽성으로 보냈다. 영호도는 방훈이 침범할까 두려워 사신을 보내 절도사를 요청하는 주문을 올리겠다고 하자 방훈은 마침내 군사활동을 쉬고 명령을 기다렸다. 강, 회를 왕래하려면 모두 수주(안휘성 수현)로 나갔는데 방훈은 이마져 빼앗아 여러 도에서 공헌하는 물건과 상인들의 화물을 약탈하여 그 길도 마저 끊겼다. 이에 방훈은 교만하여 매일 주연을 하니 주중이 간하여 말렸다. 토벌군, 하남도 송주(宋州)에 집결 서주북면초토사 왕안권이 자주 물러나자 태녕절도사 조상으로 하여금 왕안권을 대신하여 서주북면초토사로 삼았다. 위박(魏博)절도사 하전호는 그의 장수 설우를 파견하여 군사 1만3천 명을 거느리고 방훈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조상은 등(滕), 패(沛)에 진을 치고 설우는 풍(豊), 소(蕭)에 진을 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