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의절도사 장의조가 보고하기를 북정에 속한 회골의 고준이 서주, 북정, 윤대, 청진 등의 성에서 승리하였다고 하였다.(2월) 논공열은 향하는 곳마다 원수를 만들어 받아들이는 곳이 없었다. 원한을 품은 사람이 곽주에서 더부살이하는 것을 선주에 있는 탁발회광에게 알리자 탁발회관이 군사를 이끌고 쳐서 깨뜨렸다.(2월) 하동절도사 유동을 서천절도사로 삼았다(3월2일) 애초에 남조가 수주(사천성 면녕현)를 포위하고 동만의 낭계부(浪稽部)가 그것을 도와 마침내 성을 도륙하였는데, 비롱부(卑籠部)는 남조가 그들의 부형을 죽인 것을 원망하여 당나라 충무의 수병을 인도하여 낭계를 습격, 이를 멸망시켰다. 남조에서는 이로 말미암아 당을 원망하였다. 남조는 동성 등을 파견하여 성도에 가니 절도사 이복이 예절문제로 동성을 잡아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 유동이 진에 도착하여 그를 풀어주고 장안에 오도록 하여 후하게 상을 주고 위로하며 보냈다.(3월) 성덕(成德)절도사 왕소의가 병을 앓자 형의 아들인 도지병마사 왕경숭에 물려주고 사망 (3月) 토번이 빈녕을 노략질하자 빈녕(邠寧)절도사 설홍종이 격퇴(윤3月) 서천절도사였던 이복을 깎아 기왕의 왕부로 삼았다.(4월7일) 위박(魏博)절도사 하홍경이 죽자, 군대 안에서 아들 좌사마 하전호를 위박유후 세움(6月) 왕경승을 성덕유후로 삼았다(6월) 남조의 추룡은 신천절도사 양집을 파견하여 안남절도사 단추천을 도와 교지를 지키도록 하고 범닐사를 안남도통으로 삼고 조라미를 부야도통으로 삼았다.(6월) 감진칙사 위중제가 7천을 거느리고 봉주에 도착하니 고병은 군사 수를 늘려 남조를 누차 깨뜨렸다. 승리를 알리는 주문이 해문에 도착하면 이유주는 이것을 숨겨서 몇 개월간 소식이 없었다. 당 의종은 그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이유주에게 물으면 이유주는 고병이 군대를 본주에 주둔시키고 도적과 노닐면서 전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당 의종이 화를 내고 왕안권으로 하여금 고병을 대신하게 하고 고병을 소환하여 관직을 깎아내리려고 하였다. 고병은 남조의 만족을 교지에서 크게 깨뜨리고 교지성을 포위하였다.(6월) 하전호를 하박유후로 삼았다(7월) 양수를 선흡관찰사로 삼았다(10월13일) 탁발화광이 곽주에 들어가 논공열을 잡아 목을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 그의 무리는 동쪽으로 진주로 달아나자 상연심이 맞아 깨뜨리고 다 영남으로 옮길 것을 상주하였다. 토번은 이로부터 쇠약해져 걸리호의 군신은 죽을 곳을 알지 못하였다(10월) 고병이 교지(交趾)를 포위한지 열흘 남짓되자 성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왕안권의 편지를 받고 군사에 관한 일은 위중제에게 주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위중제는 이유주가 오자 섬 사이에 숨었다가 이유주가 지나가자 장안에 갔다 당 의종은 상주문을 받고 고병을 다시 안남에 진수하도록 하였다. 이래서 고병은 해문에 도착했다가 돌아왔다. 왕안권은 이유주의 명령을 받았는데 드디어 포위를 푸니 만족 가운데 달아난 사람이 태반이었다. 고병이 도착하여 다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단추천과 주도고를 죽이고 목 벤 것이 3만 여급이 되자 남조는 숨어서 떠났다. 만족 2개동(洞) 격파, 만족1만7천人 귀부해 옴(10월) 정해군(靜海軍)을 안남(安南)에 두고 고병을 절도사로 삼았다(11月)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안남이 평정되었다. 고병은 안남성(安南城)을 쌓았는데, 주위가 3천보였고 건물 40여만 칸을 만들었다.(11월) 성덕유후 왕경승을 성덕절도사로 삼았다(1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