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동군(浙東軍)은 구보와 동백관(桐柏觀)에서 싸워 부장 범거식은 죽고 토격부사 유경은이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860년 1월4일) 구보는 계속해서 섬현(剡縣)을 함락시키고, 부고를 열어 장사를 모집하니 무리가 수천명에 이르자 월주(越州)에서 크게 두려워 함.(1월14일) 절동관찰사 정지덕은 새로 모집한 병졸 5백으로 구보를 치도록 함(1월) 구보는 섬서에서 싸웠는데, 삼계(三溪) 남쪽에 복병을 숨겨두고 물 터뜨려, 절동군(軍) 5백을 거의 전멸시킴(2月10日) 이에 산과 바다에 있던 도적과 망명한 무리들이 사방에서 모여 3만명에 이르니 이를 나누어 32대(隊)를 만들고, 구보는 스스로 천하도지병마사라고 칭함. 크게 물자와 양식을 모으고 무기와 기계를 정비하니 명성이 중원을 흔들었다.(2월) 정지덕이 누차 긴급한 것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니 절서군(浙西軍)은 아장 능무정과 군사 4백을 보내고, 선흡군(宣歙軍)은 아장 백종과 군사 3백을 보내 절동(浙東)을 구원케 함. 구보의 유격기병이 평수진(平水鎭) 동쪽에 있는 작은 강에 도착 당 의종, 절동관찰사를 왕식으로 교체하고(2월). 왕식에게 충무, 의성, 회남 등 여러 도(道)의 병사를 징발하여 그에게 주었다(3월1일) 구보는 구주(衢)와 무주(婺)를 약탈하고, 또 명주와 태주(台州)를 약탈하였으며 당흥(唐興)을 깨뜨렸으며, 구보가 1만군을 거느리고 상우(上虞)를 약탈하고 불질렀다(3月19日) 여요(餘姚)에 들어가 현승과 현위를 죽였다.(23日) 자계(慈溪)를 깨뜨리고 봉화(奉化)에 들어가 영해를 점거하였으며 상산(象山)을 포위하였다. 구보의 무리 유왕과 왕로가 적극적인 군사작전을 펴서 세력을 키우면 땅이 전부 자기들에게 돌아온다고 진언하였으나 구보는 왕식을 두려워하여 망설였다.(3월) 절동관찰사 왕식이 서릉(西陵) 도착하니 구보가 항복을 받아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면박을 하고 오라고 하여 사실상 거절(4월) 왕식이 월주에 도착하여 정지덕을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4월15일), 회골과 토번 사람 1백여명을 선발하여 기병으로 삼음 왕식이 군대를 동로군과 남로군으로 편성 1)동로군: 병졸과 토단의 자제를 합한 5천 군사와 선흡에서 온 백종과 질서에서 온 능무정이 데리고 온 군대, 그리고 북쪽에서 온 장수 한종정, 석종본의 군대로 구성. 함께 상우로부터 봉화로 나가 상산의 포위를 풀도록 함 2)남로군: 의성, 충무, 회남에서 온 군대와 태주(절강성 임해시)의 당흥군(唐興軍)으로 구성, 남로군이 옥주채(정강성)를 뽑고(4월23일), 신장채(절강성 신창현)를 뽑았으며 당흥(절강성 천태현)을 뽑았다. 동로군은 영해(寧海)를 깨뜨리고(5月2日), 남로군이 태주 당흥의 남쪽 남곡(南谷)에서 구보군을 대파(5月9日). 이보다 앞서 왕식이 군사가 적다고 충무군, 의성군, 소의군의 증파를 요청하니 허락하였다. 이 3도(道)의 군사가 도착하니 충무의 장수 장인에게 당흥에 주둔하여 구보군이 남쪽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도록 하고 의성의 장수 고라예에게 영해로 가서 구보군의 소굴을 공격하도록 하며 소의의 장수 혈절규에게 구보군이 명주(절강성 영파시)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라고 함. 남로군이 해유진(海游鎮)에서 구보군을 대파하자, 구보군은 용계동(甬溪洞)으로 도주(5月11日), 남로군이 구보군을 격파(19日) 의성의 장수 고라예는 구보군 유평천의 영채를 기습 격파(20일) 이로부터 왕식의 군대가 구보군을 19번 연파 고라예가 영해에서 승리하자 왕식이 해구(海口)에 진을 치고 그들을 막도록 함. 또 망해의 진장 운사익괴 절서의 장수 왕극용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해변을 돌도록 하였는데 구보군을 영해의 동쪽에서 만나 그들의 배17척을 불사름 구보는 영해를 잃자 남진관(南陳館)에 주둔하였는데 아직 1만 군(軍)이 있었다. 동로군이 구보군의 손마기를 상류촌(上疁村)에서 격파(5월22일) 동로군이 구보를 남진관에서 대파(5월29일) 구보군이 황한령(黃罕嶺)으로부터 달아나 다시 섬현(剡縣)으로 들어왔다(6월5일) 왕식이 동 남 양로군으로 섬현(剡縣) 포위(6월12일). 양측이 83회 전투, 양군(軍)모두 지침, 구보가 항복을 청했으나 거절하고 다시 3회 전투. 구보가 항복한 것을 사로잡음(6월21일) 구보군의 유종간이 군사 5백으로 포위를 뚫고 대란산(大蘭山)으로 도주했다가 패배(7월9일) 구보를 장안에서 참수(8月) ⇒ 구보의 난 종결. 백민종이 5차례 사양하였으나 사도, 중서령으로 삼았다.(9월4일) 이덕유를 태자소보로 삼았다.(10월11일) 하후자를 서천절도사에 충임하였다.(10월23일) 안남도호 이호가 다시 파주(播州)를 배앗았다.(10月). 안남의 토착 만족이 남조의 군사를 합해 3만을 이끌고 교지(交趾)를 함락(12月3日), 안남도호 이호는 무주(武州)로 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