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하게 무너진 해운인프라…유럽·중국선사만 웃었다
출처: 매일경제, 입력 : 2016.12.12 17:38:28 수정 : 2016.12.12 19:57:44
◆ 반토막 난 한국해운 (上) ◆
"미국에 화물을 보낼 때는 현지 터미널을 갖고 있는 해운사가 필요해요. 자기 터미널을 갖고 있어야 화물이 신속하게 하역되니까요. 한진해운 붕괴로 미국 동부에 이런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토종 한국 해운사는 없어졌습니다. 말이 통하는 한국 선사에 짐을 맡기고 싶어도 비싼 해외 선사에 기댈 수밖에 없어요."(국내 전자업체 임원 K씨)
39년간 아시아 해운강자로 군림했던 한진해운이 석 달 만에 공중분해됐다. 삼일회계법인은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 중인 한진해운을 청산하는 게 더 낫다는 실사 보고서를 곧 서울중앙법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한진해운 붕괴로 한국은 9월 한진해운 법정관리 이전과 비교했을 때 전체 컨테이너 수송 능력(선복량) 59%를 상실한 상태다. 토종 해운이 반 토막 나자 중국, 유럽 선사들만 반사이익을 보며 '치킨게임' 승자로 떠올랐다. 화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해외 선사를 찾을 수밖에 없는 상태다. 한종길 성결대 교수는 "국내 화주 상당수가 외국 선사로 갈아탔다"며 "상대적으로 외국과 거래 능력이 적은 중소기업은 짐을 수송할 선사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진단했다.
◆ 중국·유럽 해운사 반사이익
한진해운은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의 '등짐꾼' 같은 존재였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수출액 73%가 해상 운송을 통해 이뤄졌다. 이 가운데 한진해운은 전국 항만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컨테이너 화물 6.6%를 도맡아 처리했다. 전국 수출입 컨테이너 76%가 모이는 부산항에서는 전체 물량 9.3%(181만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 1개를 실을 수 있는 규모)를 한진해운이 날랐다. 해운업계 고위 관계자는 "한진해운 청산은 일개 기업 퇴출이 아니다"며 "39년간 국내 해운 역사를 써온 산업의 몰락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진해운이 무너지면서 국내 물동량 상당수는 중국·유럽 업체가 가져간 것으로 추산된다.
12일 매일경제가 한진해운 법정관리 이전 글로벌 '톱15' 해운사 수송능력을 분석한 결과 하파크로이트(독일), 머스크(덴마크), 코스코(중국), MSC(스위스) 등 중국·유럽 선사들은 3개월 새 선복량을 2~4%나 늘렸다. 4개 선사는 이 기간 선박을 29척 늘리며 공격적으로 영업에 나섰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톱 해운사들이 운임료 하락을 '방조'하며 경쟁자 정리에 나서고 있는 상태였다"면서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간 사이 해외 업체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아시아 시장을 파고들었다"고 말했다.
부산항만공사에 따르면 2M(머스크·MSC)의 아시아~북미 항로 점유율은 17.5%로 지난해 대비 3.5%포인트 급증했다. 코스코(11.09%), 대만 에버그린(11.35%)도 각각 4.8%포인트, 1.4%포인트씩 입지를 늘렸다.
물동량 일부는 현대상선도 받아갔다. 현대상선 수송능력은 한진해운 법정관리 이후 4.2% 늘었다. 하지만 실제 영업력에서는 글로벌 선사와 차이가 많이 난다.
현대상선 아시아~북미 항로 점유율은 5.20%에서 5.22%로 거의 변동이 없다. 수송능력은 늘렸지만 실제 장사를 해 짐을 옮기는 비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 한국 브랜드 추락
해운업계 고위 관계자는 "채권단이 서둘러 한진해운을 법정관리로 보내는 바람에 물류 대란이 야기됐고 글로벌 화주 신뢰가 바닥에 떨어지며 한국 해운 기피 현상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호주 소재 한국 수출업체 관계자는 "일단 한국에 짐을 맡기면 성실히 옮겨준다는 프리미엄이 있었는데 이런 평판은 사라진 지 오래"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아시아 시장 확장에 공을 들이며 7년간 한진해운에 짐을 맡겼던 단골 화주인 글로벌 가구업체 A사도 다시는 한국 해운사를 찾지 않고 있다.
한국선주협회에 따르면 법정관리 이후 한진해운 선박에 실려 피해를 본 화물은 41만TEU로 화주만 8281곳에 달한다. 이들 대부분은 물류 대란 사태에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고 운송 리스트에서 한국을 지워버렸다.
더 큰 문제는 한진해운·현대상선 경쟁 체제가 무너지며 '국내 선사 공급 부족→운임 상승→해외 해운사 물량 이전→운임 상승'이라는 악순환 고리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실제 한진해운 법정관리 직전인 지난 8월 말 1TEU당 596달러였던 컨테이너 평균 화물운임은 12월 현재 795달러로 33%나 급증했다.
다만 해운업계 고위 관계자는 "올해 글로벌 상위 20개 해운사 적자가 총 100억달러에 달할 전망"이라며 "해외 선사가 끝내 치킨게임 승자로 자리 잡을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코트라 무역관장은 "수출만이 살길인 우리나라 경제구조상 수출 물류를 안정되게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한진해운 사태로 한국 경제에 대한 현지 이미지가 크게 실추됐다"고 말했다.
[김정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