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봉의 진실(20) < 연표 3 > 년 | 내 용 | 819 | [원화] 14년(819) 정월에 칙유를 내려 말하기를, “짐이 천하를 통치함에 진실됨을 받들고, 신의를 널리 펼치고자 하였다. 서융이 나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를 여러 해 되었으니, 중간에 혹은 이지러지고 거스르기도 하였으나, 일찍이 모두 포용하고 용서하였다. 내게 예사롭지 않은 덕이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으나, 거듭 통역하고 진귀한 물건을 공납하기를 끊임없이 하였으니, 은혜를 펼치고 예를 보임에 일찍이 누락됨이 없었다. 얼마 전에도 토번의 사신이 장(章)을 받들어 또 경사(장안)까지 와서 군장(君長)의 명령에 따라 화의의 성의를 진술했다. [이에 짐이] 전각의 평대(平臺)까지 나와 [토번의 사신을] 만나, 숙소에서 대우를 후하게 하도록 하고, 다시 신폐(信幣)를 주고, 서신을 보내 깨우쳐 말하였다. 이에 사신이 막 [토번으로] 돌아가 근교에 도착했는데, 듣자하니 토번의 군대가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우리 영토를 침범하니 하곡 지역이 침입을 받아 자못 소란해졌다. 은혜를 배반하고 약속을 저버려, 아무런 명분이 없으니, 조정의 의논과 백성의 뜻이 모두 [군대를 내어 토번을] 주살하고 절교하라고 한다. 짐이 깊이 생각건대 덕화(德化)가 아직 미치지 못함이니, 어찌 오랑캐의 풍속이 빈객의 예에 맞지 않음을 근심할 것이며, 그 나라가 신의를 잃음에 [어찌] 그 사신을 벌줄 것인가! 그를 방면하여 귀국하게 함으로써 너른 가슴을 보이고 조그만 허물은 잊을 것이다. 내 진심을 보여 그들로 하여금 감읍하게 할 것이다. 토번의 사신 논구립장 등과 뒤따라 온 사신들을 모두 방면하여 귀국하게 하라. 또한 봉상절도사에게 위임하여 이 뜻을 분명히 알려라.”라고 했다. 8월에 토번이 경주(慶州) 방거에 주둔하고, 대군이 하주의 경계에 이르렀다. 10월에 토번의 절도(節度) 논삼마 및 재상 상탑장, 중서령 상기심아가 함께 약 15만의 군사를 이끌고 우리 염주를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당항의 수령 역시 발병하여 양, 말을 몰고 와서 이를 도왔다. 30여 일이 지나, 적이 높은 사다리와 아차(鵝車), 목려(木驢) 등 공성기로 사방을 일제히 공격하니, 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른 것이 4번이나 되었다. 자사 이문열이 병사를 이끌고 힘써 싸웠으나 성은 뚫리고 지킬 수가 없어 기왓장을 철거하여 막고 주야로 방어하니, 때로는 몰래 습격하고, 때로는 성문을 열고 출전하여 죽인 적병이 약 만여 명에 이르렀다. 여러 도(道)에서 구원병이 도달하지 않았다. 대략 27일에 적이 물러갔다. <구당서 토번전> | 820 | [원화] 15년(820) 2월에 비서소감 겸 어사중승 전계가 토번에 들어가서 [헌종의] 상을 고하고 [새로운 황제의] 책립(冊立)을 알렸다. 3월에 [토번이] 우리 청새보(靑塞堡)를 공격해서 약탈했다. 7월에 사신을 보내 제사에 참석했다. 10월에 경주(涇州)에 침입해서 압박했다. 우군중위 양수겸을 좌우신책, 경서(京西)와 경북(京北)의 행영도감에 임명하여, 신책병 4천을 거느리게 하고, 아울러 8진(鎭)의 전군을 출병시켜 가서 구원하게 했다. 태부소경 겸 어사중승 소동에게 명하여 절(節)을 지니고 토번에 들어가게 하면서, [그를] 답청화호사(答請和好使)에 임명하고, 앞서 토번에 사신으로 갔던 비서소감 전계를 침주사호(郴州司戶: 침주- 현재 호남성 동남 침주시)로 좌천시켰다. 처음에 전계가 조제사(弔祭使)에 임명되어 토번에 들어갔을 때, 토번이 장무성(섬서성 장무현) 아래에서 회맹하기를 청하니, 전계가 겁이 많은 사람이어서, [본국으로] 귀환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하자는 대로 따를 뿐이었다. 지금 서융(西戎)이 쳐들어오면서 말하기를, “전계가 내게 병사를 이끌고 맹서하러 오라고 했다.”라고 하여, 마침내 [전계를] 좌천시켰다. 서융은 사실 [당의] 변경 장수들이 그들을 교란시킴에 격노한 것이었으며, 다만 전계의 일을 구실로 삼았을 뿐이었다. 경주(涇州)에서 글을 올려 말하기를, “토번의 대장이 물러갔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책행영병을 파했다. 전진(田縉)이 하주를 통치한 이래로 그의 탐욕스러움과 침략하고 어지럽힘으로 인해 당항이 이를 괴롭다고 여겼고, 이에 여러 차례 서융을 끌어들여 변경을 침범했다. 이 때 대군이 침입하니, 변경의 장수 학자(郝玼)가 여러 차례 토번의 군영을 습격하여 [토번군을] 살육함이 매우 많았고, 빈주(邠州)의 이광안이 다시 전군을 이끌고 이르니, 서융이 두려워하여 퇴각했다. 처음에는 전진이 나라의 걱정거리를 만들었으나, 이광안과 학자에 의지하여 살육하고 쫓아낸 것이었다. 11월에 하주절도사 이우가 병사를 이끌고 장택진에 이르렀고, 영무절도사 이청이 병사를 이끌고 장락주(현재 영하 남부 산지 동심현 위주진 일대)에 도착하여 함께 조서를 받들어 토번을 토벌했다. 12월에 토번군 천여 명이 오(烏)와 백지(白池)를 포위했다. <구당서 토번전> 목종(穆宗:12대 군주)이 즉위하자(820년 윤1월 병오일-3일) 회골이 다시 합달간을 보내 집요하게 청혼을 하자 허락해주었다.<신당서 회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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