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봉의 진실(15) <연표-3> 년 | 내 용 | 801 | [정원] 17년(801) 7월에 토번이 염주(鹽州①)에 쳐들어왔다. 또한 인주(麟州②)를 함락시키고, 자사 곽봉을 죽였으며, 성곽과 해자를 훼손시켰고, 주민을 많이 납치한 후, 당항의 부락을 쫓아버리고 갔다. 그 다음으로 염주(鹽州) 서쪽 90리에 위치한 횡조봉에서 군대를 멈추고, 연주(延州③)의 승려 연소 등 7명을 불러, 서사인(徐舍人)이 부른다고 했다. 화대(火隊) 토번 몰륵(沒勒)이 즉시 연소 등을 이끌고 급히 천막 앞으로 왔는데, 모두 말가죽으로 손을 묶고 모승(毛繩)으로 목덜미를 묶었다. [그곳에서] 토번의 나이 어린 자를 보았는데, 신장이 6척 남짓이었고, 붉은 콧수염에, 큰 눈을 가진 자로 그가 바로 서사인이었다. 결박을 풀어주고 천막 안에 앉게 한 뒤 말하기를, “사부는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는 본래 한인(漢人)으로 사공(司空) 영국공(英國公:이세적)의 5대손이오. (측천)무후가 왕실을 해치니, [우리] 고조가 세운 충의가 중도에 쇠하였고, [이에] 자손들이 머나먼 변방에 흘러들어 온 지 지금 3대가 되었소. 비록 대대로 관직에 오르고 세습하여 병권을 장악하고 있지만, 근본을 생각하는 마음은 끝이 없고, 혈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스스로 그칠 수가 없소. 여기는 토번과 당의 국경으로 다시 90리를 가면 안락주(安樂州: 영하성 중위현④)에 이르니, 사부는 동쪽으로 돌아갈 수 없소.”라고 하였다. 연소가 말하기를, “소승은 독신으로 부모가 연로하시니 간절히 바라건대 온전히 살길 바랍니다.”라고 하며 슬픔을 억제하지 못했다. 서사인이 다시 말하기를, “나는 명을 받들어 군대를 이끌고 변경을 방어하러 왔다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점차 당의 영토에 들어갔는데 전전하다 보니 동진하여 인주(麟州)에 이른 것이오. 성에 방비가 없고 원병도 끊어져서 함락시킨 것이오. 곽사군은 공신의 자손이란 것을 알아, 반드시 그를 살리고자 했으나, 불행히 반란군에게 해를 입었소.” 그 때 마침 비조사(飛鳥使)가 왔는데, 비조는 중국의 역기(驛騎)와 같은 것이다. [비조사가] 말하기를, “점치는 자가 변이 있을 것이라 하였으니 군대를 불러 빨리 돌아오십시오.”라고 하니 드디어 귀환했다. 당시 위고(韋皋)에게 조서를 내려 편장을 나눠 보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성도(成都) 서산(西山⑤)에서 출병하여, 남북 9도(道)로 함께 전진하고, 서계(棲雞⑥), 노옹(老翁⑦), 옛 유주(維州⑧), 보주(保州⑨), 송주(松州⑩) 등 여러 성을 압박하였는데, [이는] 북변의 근심을 풀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정원 17년(801년)] 9월에 위고가 토번을 유주(維州)에서 대파했다. <이상 구당서 토번전> | 802 | 정월 위고가 토번의 큰 수령 논망열을 잡아와 바치자, 황상이 숭인리(崇仁里)에 택지를 주어 그 곳에 살도록 했다. 앞서 정원 16년에 위고가 여러 차례에 걸쳐 토번 군사 2만여 명을 여주(黎州①)와 휴주(巂州②)에서 격파했는데, 이에 토번이 대대적으로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보루를 쌓고, 배를 만들어 몰래 침입할 계획을 세웠으나, 위고에게 모두 꺾였다. 이때 토번의 마정덕이 휘하의 대장 87명과 함께 부락 전체를 이끌고 투항했다. 그 다음 해에 토번의 곤명성(昆明城③)이 관할하는 마사(磨些④)의 오랑캐 천여 호가 또 투항했다. 토번은 자신의 무리가 밖에서 무너지니, 북쪽으로 영주(靈州⑤)와 삭주(朔州⑥)를 침입하고, 인주(麟州⑦)를 함락했다. 이에 조서를 내려 위고(韋皋)로 하여금 성도(成都) 서산(西山)으로부터 출병하여 북변의 긴장을 완화시키도록 했다. 이때 찬보가 논망열에게 여러 오랑캐 10만을 이끌고 가서 유주(維州)의 포위를 풀도록 했는데, 당의 군대 만여 명이 험한 곳에 매복하여 매복한 곳에 토번군이 걸려들자, 모든 장수들이 사방에서 맹공하여 논망열은 사로잡히고 토번군은 크게 궤멸되었다. <구당서 토번전> | 803 | [정원] 19년(803) 5월 토번의 사신 논협열이 이르렀다. 6월에 우룡무대장군 설비를 어사대부에 겸하여 토번에 사신으로 보냈다. <구당서 토번전> | 804 | [정원] 20년(804) 3월 상순에 찬보가 죽었다. 조정의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공부시랑 장천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찬보는 정원(貞元) 13년(797) 4월에 죽었고, 큰 아들을 세웠으나 일 년 만에 죽자, 둘째 아들이 자리를 계승했다. 문무 3품 이상의 관리에게 명하여 토번의 사신에게 조문하도록 했다. 4월에 토번의 사신 장하남관찰사 논걸염과 승려 남발특계파 등 54명이 입조했다. 12월에 사신 논습집과 곽지숭이 입조했다. <이상 구당서 토번전> | 805 | [정원] 21년(805) 2월 순종(順宗)이 명하여 좌금오위장군 겸 어사중승 전경도로 하여 절을 가지고 토번에 가서 문상하게 하고, 고부원외랑 겸 어사중승 웅집역으로 부사를 삼았다. 7월에 토번의 사신 논실낙 등이 입조했다. 10월 찬보의 사신 논걸루발장이 입공하였고, 덕종(德宗)의 산릉(山陵)에 금은, 의복, 소, 말 등을 주어 장례를 도왔다. 11월에 위위소경 겸 어사중승 후유평을 입번고책립등사(入蕃告冊立等使)에 임명했다. <이상 구당서 토번전> 영정 원년(805)에 [회신]가한이 죽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홍려소경 손고에게 장례에 참여하고 계승을 한 [가한을] 등리야합구록비가가한 이라고 책명하게 했다.<신당서 회홀전> |
※ 신구당서 회홀전에는 795년 7월부터 805년 10월까지 기록이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