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책봉의 진실(14)

상 상 2016. 11. 24. 18:33

책봉의 진실(14)

 

<연표-2>

내 용

799

[정원(貞元)] 15(799)에 이모심은 토번을 칠 것을 모의하였다. 등천(邆川), 영북(寧北) 등의 성들이 공격로에 해당하였으므로, 가파른 산에 깊은 해자를 만들어 싸울 준비를 하였다. 황제는 출병하여 조력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모심은] 위고(韋皐)에게 대신 자제를 볼모로 보내겠다고 청하였다. 위고가 사양하였으나 굳이 청하므로 모두 성도(成都)에 살면서 취학하도록 하였다. 곤명과 수주(雟州)는 토번과 접하여 있으니 먼저 군대를 늘리지 않으면, 적에게 위협을 받아 도리어 우리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위고에게 대책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당시 당의 군대는 해마다 경서(京西)와 삭방(朔方) 지역에 주둔하였데, 군량을 잔뜩 쌓아놓고 남북으로 동시에 공격하여 고지를 취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방의 경우에는 군량 수송 기한이 늦추어지고, 병사는 모두 모이지 않았다. 이해 여름 적에 흉년이 들고 돌림병이 창궐한 데다, 찬보가 죽고 새로운 군주가 즉위하였다. 위고는 적이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 짐작하고, 이모심에게 천천히 거행하여 만전을 기하는 것이 서두르다 공이 없는 것보다 낫습니다. 지금 국경 지역에는 전보다 열 배는 많은 군대가 있고 또 행영(行營)이 모두 수주에 있으니, 서로(西瀘)에서 토번의 길을 장악하면 곤명과 농동(弄棟)은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권하였다. 이모심은 다른 해에 기약하기를 청하였다.

토번의 대신들은 그 해의 간지(干支)가 경진(庚辰)으로 진()이 들었으므로 군대를 내기에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남조를 습격할 것을 도모하여, 무리를 통솔하여 길을 닦았다. 장차 10월에 수주(雟州)를 포위할 목적으로 곤명에 약 8만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모두 1년분의 군량을 준비하도록 명하였다. 찬보는 외숙 양약라를 도통(都統)으로 삼고, 상걸력과 기서남삭을 보내 서공천(西貢川)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모심과 위고는 서로 알리고, 위고는 부장 무면(武免)에게 명하여 노사(弩士) 3,000을 이끌고 달려가게 하고, 항영조(亢榮朝)10,000명을 거느리고 여주(黎州), 그리고 위량금(韋良金)25,000명을 이끌고 수주(雟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남조와 약속하기를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모두 진군하는데 아준첨성(俄準添城: )을 지날 경우에는 남조가 군량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토번은 무리 5만을 이끌고 낭공천(曩貢川)으로부터 군대를 둘로 나누어 운남을 공격하였는데, 일 군은 낙제성(諾濟城)으로부터 수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모심은 동만(東蠻)과 마사(磨些)의 거취를 추측하기 어려워 두려워하였다. [그들이] 토번의 향도가 될까 염려하여 먼저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위고가 다음과 같이 통지하였다. “수주는 실로 교통의 요지여서 여러 주를 방어하니, 적이 백방으로 넘봅니다. 그런 까닭에 강력한 부대로 지키게 하고 주둔지와 방벽을 촘촘히 설치하였으며 군량과 무기를 도처에 마련해 놓았으니, 동만이 어찌 감히 두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이모심은 이에 동만과 마사의 여러 만에게 격문을 보내어, 식량을 성안으로 들이고, 들이지 못한 것은 모두 태우게 하였다. 토번의 옹성장(顒城將) 양만파가 항복할 것을 기약하였으나, 일이 지연되는 바람에 토번이 병사 5천으로 성을 지키게 하였으나, 위고의 장수들이 격파하였다. 양만파가 농관(籠官: 토번의 장수 직명)과 함께 옹성(顒城)을 함락시킨 이래로 옹성의 인민 2000을 숙천(宿川)으로 옮겼다. 위고의 장수 부충의가 또 말공성(末恭城)을 취하였는데, 노획한 소와 양이 천을 헤아렸다. 찬보의 대장 기전양율이 군대를 십공천(十貢川)에서 일사(一舍: 군대에서 하루의 행군 거리, 30)의 거리에 군대를 주둔하였으며, 국사(國師) 마정덕(馬定德)이 종족 부락을 이끌고 나와 항복하였다. 서공절도감군(西貢節度監軍) 야다수전은 찬보 걸립찬의 양자여서, 마땅히 전 찬보를 따라 죽어야 했는데, 그 또한 부충의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적의 기세가 꺾여 군대가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기서남삭이 철교(鐵橋)에 이르자, 남조(南詔)가 그 물에 독을 풀어 사람이 많이 죽었다. 이에 [남조는] 납천(納川)으로 옮겨 방벽을 쌓고 대기하였다. 이 해에 토번은 때 이른 서리와 눈 때문에 아무런 전공 없이 철군하였으며, 다음해를 기약하였다. 토번은 당과 남조가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는 것 때문에 고전하였고, 또한 감히 남조를 도모하지 못하였다. 위고는 부장 무면에게 수주에 주둔케 하여 각급의 요해지를 지키게 하였는데, 비록 남조와의 경계지역이라도 요해지가 있는 곳이면 주둔하여 지키게 하였다. 토번은 들판에서 여러 차례 패한 것을 교훈으로 삼아, 노수(瀘水)곁 세 개의 지점에 둔()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논망열을 보내 노수 주변의 여러 만(:야만족)을 유치하여 실섭(悉攝)에 다시 성을 쌓았다. 실섭은 토번의 주요 요새지이다. [노수 주변] ()의 추장들이 은밀히 남조와 위고의 부장 두비라를 인도하여 [실섭을] 기습하였다. <신당서 남조전>

800

(정원)16(800) 6월에 염주(鹽州)의 군대가 토번을 오란교(烏蘭橋) 아래에서 격파했다.

<구당서 토번전>

 

[정원] 16(800) 영주(靈州)의 군대가 적을 오란교에서 물리쳤고, 위고는 말공(末恭)과 옹() 두 성을 점령했다. <신당서 토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