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봉의 진실(8)
계속해서 구당서 회홀전을 보면 그리고 (790년) 6월, 힐간가사가 서쪽에 대한 토벌에서 돌아와 아장에 이를 즈음에 차상 (次相)등이 그 이후에 폐립이 벌어질 것을 걱정하고 중국 사신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 [곽]봉을 몇 달 동안 잡아두었다가 돌려보냈다. ........(중략)...... 이로부터 그 나라가 조금 안정되자 바로 달북특근 매록장군(梅錄將軍)을 보내 충정가한의 죽음을 우리나라에 알리고 새로운 군주를 책명해줄 것을 청했다. 사자가 오자 사흘 동안 조정의 일을 보지 않으며 3품 이상의 관리들이 홍려시에 가서 그 사자에게 조문하게 했다. 이 해(790)에 토번이 북정도호부를 함락했다.(自是其國稍安,乃遣達比特勤梅錄將軍告忠貞可汗之哀於我,且請冊新君。使至,廢朝三日,仍令三品已上官就鴻臚寺弔其使。是歲,吐蕃陷北庭都護府) ...........(중략)......... [정원] 6년(790) 가을 [힐간리는] 그 나라의 장정 모두 5만 명을 징발하고 [양]습고 마저 불러 다시 [북정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패배해 죽은 사람이 절반이나 되었다. 힐간리도 나머지를 모두 수습해 밤낮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양]습고의 남은 무리가 겨우 160명 정도였는데 다시 서주로 들어가려고 하자 힐간가사가 속여 말했다. “그대가 나와 같이 아장으로 간다면 그대를 조정으로 돌아가게 해주겠소이다.” 아장에 도착한 이후 잡아두고 보내지 않다가 마침내 죽여 버렸다. 이로부터 안서(安西)와 끊어지게 되어 그의 존망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오직 서주의 사람들만이 여전히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힐간가사가 패배하고 갈[라]록이 승리를 틈타 회흘의 부도천(浮圖川: 신강 유오이 자치구 길목살이현 북정 고지-故址 부근에 있는 하천)마저 빼앗자 회흘이 놀라 모두 서북 부락의 양과 말 전부를 아장의 남쪽으로 이동시켜 피했다. |
라고 되어 있는데 자치통감을 보면 (790년) 5월, 회홀의 힐간가사가 토번과 싸워 이기지 못하자, 토번은 급히 북정(도호부)을 공격하였다. 북정사람들은 회홀이 혹독하게 요구하는 것을 괴로워하여 사타 추장 주야진충과 더불어 모두 토번에 항복하였으며 (북정)절도사 양습고가 휘하에 있는 2천명을 인솔하고 서주로 도망하였다. ...........(중략)....... (790년) 가을에 힐간가사가 그 나라의 병사 수만을 모두 들어가지고 장차 북정을 회복하고자 하였는데, 또 토번에게 패배하니 죽은 사람이 절반이나 되었다. ...(중략)... 갈록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회홀의 부도천을 빼앗으니 회홀이 두려움에 떨며 모두 서북쪽에 있는 부락을 아장의 남쪽으로 옮겨 이를 피하였으며 달북특륵인 매록을 파견하여 곽봉을 따라 함께 와서 충정가한의 상사를 알렸고 또 (새로운 가한의) 책명을 청하였다.(秋,頡干迦斯悉舉國兵數萬,召楊襲古,將復北庭,又為吐蕃所敗,死者大半。...(중략)...葛祿乘勝取回鶻之浮圖川,回鶻震恐,悉遷西北部落於牙帳之南以避之。遣達北特勒梅錄隨郭鋒偕來,告忠貞可汗之喪,且求冊命) |
라고 되어 있어 790년 5월에 힐간가사는 토번의 전쟁에서 패하였고, 이때 북정도호부가 토번에 함락된 것 이다. 그래서 790년 6월에 힐간가사가 회홀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구당서 회홀전에는 회홀이 매록장군을 보내 충정가한의 죽음을 당나라에 알리고 새로운 군주를 책명해줄 것을 청한다. 즉, 구당서 회홀전에는 충정가한의 죽음을 알리고 새로운 군주의 책명을 청한 것이 790년 6월로 되어 있다. 그 다음 790년 가을(7월~9월)에 회홀의 힐간가사가 북정도호부를 수복하고자 또 공격하였으나 회홀이 다시 패하니 갈록이 회홀의 부도천을 빼앗자 회홀이 서북쪽에 있는 부락을 아장의 남쪽으로 옮겼다.(구당서와 자치통감 동일) 그 후에 달북특근인 매록장군을 곽봉과 함께 당에 보내 충정가한의 상사를 알리고 새로운 가한의 책명을 청한 것으로 자치통감은 되어 있다.(대략 790년 9월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