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봉의 진실(5)
5책봉의 진실(4)
계속해서 구당서 회홀전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치통감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즉, 788년 10월 당 덕종이 자신의 친딸인 함안공주를 회흘 가한에게 시집보내며 회홀과 또다시 동맹을 맺는다. 789년 12월에 골돌록장수천친 비가가한이 죽었다고 하니 여기서 회홀의 가한은 당 덕종이 무의성공 가한으로 책명한 합골돌록 비가가한임을 알 수 있다. 왜 당 덕종은 자기의 친딸을 회홀의 가한에게 시집보내야만 했을까?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가, 783년 1월 15일, 당과 토번은 청수회맹을 맺으면서 양측의 국경을 획정하고 화평을 선언한다. 그런데 그해 10월 ‘경원병변(涇原兵變)’이 일어나 당 덕종은 주차에게 장안을 빼앗기고 주차는 장안에서 황제로 등극하며 진(秦)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당은 이를 진압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당은 토번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784년 2월 토번이 주차의 난을 토벌하는데 구원군을 보내 주었다, 그 대가로 당은 경주, 영주, 안서도호부, 북정도호부 등 4개의 주를 토번에 할양하기로 약정하였다. 이러한 약정과 토번의 도움으로 당나라는 마침내 7개월 만에 장안을 탈환하고, 당 덕종은 장안으로 환궁하였다.(7월13일)
그러나 주차의 난을 평정하자 당 덕종은 토번에 주기로 한 4개 주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786년 8월 토번이 경주, 농주, 빈주, 영주 등 여러 도(道)를 공격하여, 11월 염주를 함락하고, 12월에 하주를 함락시키고 은주를 공격하였다.
이렇게 되자, 787년 봄 당이 토번과 또다시 회맹하기로 하고 당은 회맹 전에 염주와 하주를 돌려달라고 부탁한다. 이 회맹이 평량회맹인데
평량회맹 때(787년 5월 15일) 토번이 무력을 사용하여 당의 고관 60여 명을 체포하고, 죽인 병사가 5백, 포로로 잡은 병사가 천여 명이었다. 당이 거짓말을 한데 대한 응징이었다.
이어서 토번은 788년 5월 3만여 기병을 동원하여 경주((涇州), 빈주, 영주, 경주((慶州), 인주 등으로 쳐들어가 팽원현의 관청을 불태우고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788년 9월에 토번이 또 영주에 쳐들어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