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78,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23, 6. 토번의 침공 이후-23)

상 상 2016. 9. 23. 17:14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78,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23, 6. 토번의 침공 이후-23)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6. 토번의 침공 이후

1) 연표

2) 해설

3) 간추린 해설

4) 요약

 

 

2) 해설(토번의 침입 이후) - (8)

 

한편 당나라는

토번과 회골의 쇠퇴에 하황(河湟)4()·18개주에 대한 탈환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토번에서는

논공열이 상비비를 선주에서 치자 상비비가 군사를 나누어 다섯 길로 만들어 그를 막았다.

논공열이 물러나 동곡을 지키니 상비비는 목책을 만들어 그를 포위하고 물길을 끊었다.

논공열이 포위를 뚫고 박한산으로 달아났고 나머지 무리는 모두 상비비에게 항복하였다.(3)

다시 소의절도 유진 토벌쪽에서는

충무절도사 왕재가 택주를 공격하였다(4)

 

한편,

환관 구시량의 과거 죄악이 드러나 관직과 작위를 삭탈하고 재물을 적몰한다.(6)

그리고 중서시랑 이신을 회남절도사로에 충임하였다.(711)

 

다시 소의절도 유진 토벌쪽에서 토벌에 결정적인 단서를 잡는다.

 

유진의 심복 고문단이 항복하여 이덕유가 고문단에게 유진을 깨뜨릴 책략을 물으니

진주와 허주의 군대로 하여금 거하를 지나 성채를 세우고

이 영채로부터 성을 쌓아 협성을 만들어 택주를 둘러싸게 하고,

고진채와 청룡채는 천연요새이나 물이 없으니 물길을 끊으면 빼앗을 수 있다.

또한 유진이 심복들을 죽여 도두(都頭) 왕쇠가 유진을 의심하고 있으니

왕쇠에게 유진을 잡으면 절도사에 제수하겠다고 하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토벌에 결정적 단서가 되어

 

소의절도 유진의 무리 형주의 자사 최하와 배문이 왕원규에게 항복하고(725)

그 소식을 듣은 고원무도 항복하였다.

유진의 무리 명주(洺州)의 왕쇠와 자주(磁州)의 안옥 역시 하홍경에게 항복하고

 

3개 주()가 항복했다는 소식에 곽의와 왕협은 유진을 죽이기로 모의하여

곽의는 유진과 가까운 동가무를 내세워 유진을 죽이고 그 종족들을 몰살하며,

그 심복들과 그 가족까지 모두 몰살하였다.(8)

 

그리고 당 조정은 노균을 산남동도에서 파직시키고 소의절도사를 전담하게 하였다.

유진의 수급이 장안에 도착하고(818)

택주(澤州: 소의절도)를 하양절도에 예속시켰다.(9).

 

그리고 소의절도사에 임명된 노균이 노주에 들어와 사람들을 안무하니 소의절도는 드디어 안정되었다.

또한 유진의 부하장수인 곽의, 왕협, 동가무 등이 장안(長安)에 도착하자 모두 참수하였다.(97)

이로써 소의절도 유진의 난이 겨우 종결되어 하삭3진 이외에 더 이상 절도사들이 독립하는 것을 막았다.

한편 붕당정치는 아직도 계속되어

이덕유가 동도유수 우승유와 호주자사 이종민을 참소하여 우승유를 좌천시키고 이종민을 유배 보냈다.

 

그리고

충무절도사 왕재를 하동절도사로 하중절도사 석웅을 하양절도사로 옮겼다.(12)

 

845

 

새해들어 비서감 노홍선을 의무절도사로 삼는다(112)

 

회창멸불(會昌滅佛) : 中國 3차 삼무일종의 폐불(8455~8)

사부에서 전국의 46백개 절, 사원 4, 승려 265단속하였다고 보고(8455)

당 무종은 전국의 불교 사원 철폐하고 장안과 ·낙양에만 각기 2개의 사찰 남기며,

1사찰에 승려 30 명으로 제한한다(7)

 

또한 절도사와 관찰사의 치소와 동주(), 화주(), 상주(), 여주(汝州)에 각기 1개 사찰 남기고,

3등급으로 나눠 승려수 제한하였다.

나머지 승려와 비구니들은 대진(大秦.배화교, 조로아스트교) 사제들과 함께 환속시켰다.

사찰의 재산은 모두 관청으로 몰수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의 철폐된 사찰 46백구(), 환속된 승려 265백명, 배화교 사제 2천여 명이고,

훼손된 사원 4만여 구, 경지 수천만 경과 노비 15만명을 몰수하였고, 20명을 남겨둔 사찰은 반으로, 10명을 남겨둔 사찰은 3명으로 줄이고, 5명을 남겼던 사찰은 철폐시켜, 재차 승려 감축하였다.(87)

 

그리고 하동도 오대산(五臺山)의 승려들이 유주(幽州)로 도주하자, 노룡절도사 장중무가 거용관(居庸關)에 칼을 보내 죽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