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71,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15, 6. 토번의 침공 이후-15)

상 상 2016. 8. 31. 18:05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71,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15, 6. 토번의 침공 이후-15)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6. 토번의 침공 이후

1) 연표

 

1) 연표-15(연표 끝)

당나라의 상황

(출처: 신구당서 토번전 등 및 자치통감)

849

당초에 태종이 설인고를 토벌하여 농() 위쪽의 땅(농서-隴西를 뜻한다)을 얻었고, 이궤를 포로로 삼아 양주(涼州)를 얻었으며, 토욕혼, 고창을 격파하여 4(四鎭)을 개척했다. 이어서 현종은 황하의 적석, 완수 등의 군()을 아울렀으니, 중국은 40년 동안 척후나 경비를 두지 않았다. 윤대와 이오에 둔전을 개간하니 벼와 콩의 경작지가 넓게 펼쳐졌다. 개원문 위에 쓰기를 서쪽 끝까지 길은 99백 리라고 하여, 변경을 지키는 자들에게 만 리 까지 행할 일이 없음을 보였다. 건원(乾元) 이후, 농우, 검남, 서산 3(三州) 7(七關)의 군진(軍鎭) 감목(監牧) 3백 곳을 모두 잃었다. 헌종이 항상 천하도(天下圖)를 열람하곤 했는데, 하황(河湟) 일대의 옛 영역을 보고, 성난 모양으로 이들을 경략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 때 여러 신하들이 상주하여 말하기를, “왕이 된 자는 공을 세우고 업을 이뤄야 세상에 드러내 현양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 명의 병사도 내지 않고, 피 흘리지 않으면서, (), ()이 스스로 귀속된다면, 천자께 존호를 바치도록 청하겠습니다.”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헌종은 일찍이 하(), ()을 걱정하셨으나 대업을 이루지 못하시고 승하하셨다. 지금 조종의 업적을 좇아 술회하는데, 그 의논이 순종과 헌종의 시호(謚號)를 논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자랑하여 후세에 드러내게 하라하고, 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짐은 잠시 백성을 쉬게 할 것이니, 산외(山外: 사천성 성도 서부에 연접한 산악지대, 현재 사천성 송반현 첩계영의 서쪽) 여러 주는 후에 경영할 것을 기다려라.”

<신당서 토번전>

850

진주(秦州)를 봉상절도에 예속시킴(8502).

중서시랑 마식을 천평절도사로 삼았다(42)

마식은 당 선종이 황제가 되는데 큰 힘을 쓴 환관 마원지의 종친이다.

 

노룡절도사 주침이 사망하자 군대 안에서 압아 겸 마보도지병마사 장윤신을 노룡유후로 세움

(923)

당항이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어 계속 토벌했으나 실패(9).

 

토번의 논공열이 상비비의 군대를 백토령에서 쳤다. 상비비가 파견한 장수 촉공노력은 수비를 주장하였으나 마리비자가 받아들이지 않자 선조로 돌아가고 마라비자는 싸웠으나 패하여 죽었다. 상비비는 식량이 모자라 탁발회광을 남겨 선주를 지키게 하고 감주 서쪽으로 갔다. 논공열이 이 소식을 듣고 그를 뒤쫓아 과주에 도착하였으나 탁발회관이 선주를 지킨다는 소식을 듣자 하서의 선주와 곽주 등 여덟 주를 약탈하여 5천리 사이는 붉은 땅이 되고 사람이 없어졌다.(9)

 

노룡유후 장윤신을 절도사로 삼았다.(11)

 

< 이상 자치통감 >

851

이듬해(대중 5, 851) 사주(沙州)의 수령 장의조(張義潮)가 과주(), 사주(), 이주(), 숙주(), 감주() 11주의 지도를 바쳤다. 당초 장의조는 몰래 영웅호걸과 결탁하여 당에 귀부하였는데, 하루는 여러 무리가 무장하고 주성의 문 앞에서 함성을 지르고 [소란을 피우자], 한인(漢人)들이 모두 이들을 도왔는데, [성문을] 수비하던 토번의 군졸이 놀라 달아났고, 드디어 사주의 일을 [장의조가] 맡아 보게 되었다. [장의조는] 무기, 군수품 등을 잘 정비하였고, 한편으로 경작하고 한편으로 싸워, 그 나머지 주()들도 모두 회복하였다. [또한 장의조는] 매우 빼어나고 충성스러운 부장 열 명에게 표문을 몸에 지니고 동북으로 가서 천덕성(天德城: 오르도스 북쪽 황하 북안에 위치)에 이르도록 했는데, 방어사 이비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황제는 그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사신에게 조서를 가지고 가서 접수하고 위로하도록 명하니, 장의조는 사주방어사에 발탁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의군(歸義軍)이라 칭하고, 곧 절도사로 삼았다. 그 후 하주(), 위주(渭州)의 토번 장군 상연심이 자국이 패망함에 따라 역시 와서 우호관계를 맺었다. 진주자사 고병이 상연심과 혼말부(渾末部) 만 장()을 꼬셔서 항복시키니, 2(하주, 위주)를 수복하였고, 상연심은 무위장군에 임명하였다. 고병이 봉림관(鳳林關: 감숙성 임하현 서쪽)을 수복했고, 상연심을 하주, 위주 등지의 도유혁사(都游弈使)로 삼았다.

<신당서 토번전>

 

토번의 섭사주(沙州)자사 장의조가 토번군()을 내쫒고 항복함.

사주방어사로 삼았다(851219)

염철전운사 배휴. 문종 때 40만곡으로 떨어진, 강회(江淮)에서오는 조운을, 조법10조 확립하여

120만곡 이르게 함(2)

선종. 이복 하수(夏綏)절도사 삼아, 당항족 위무·안정시킴(2)

빈녕절도사 백민중. 하주(夏州) 삼교곡(三交谷)에서, 평하(平夏)당항 9천여장() 격파(410)

토번 반란군() 논공열. 무리들 이탈에, 입조했다 원하는걸 얻지못하자 다시 돌아감(5)

남산(南山)당항 투항해오자, 재정부족으로 사면시킴(8)

산남서(西)도 봉(() ()의 도적떼. 계산(雞山)에 의지하여 삼천(三川)지역 약탈,

과주()자사 왕지홍 토벌케 함(10), 평정(8522)

사주(沙州)방어사 장의조. 농우도 10개 주() 경략·평정,

형 장의택 파견 선종에 바침 : 88년만에 농우도 전역 탈환(85110)

하황(河湟.농우도) 11개 주() : (.돈황), (.진창), (.이오), (西.고창,투루판), (.장액), (.주천), (.금성), (.서평), (.부한), (.일낙), (.화성) ()

장의조 귀의(歸義) 절도사·11() 관찰사 제수(11) :

사주(沙州) 돈황에 귀의(歸義)절도 설치

 

< 이상 자치통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