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70,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14, 6. 토번의 침공 이후-14)

상 상 2016. 8. 29. 19:24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70,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14, 6. 토번의 침공 이후-14)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6. 토번의 침공 이후

1) 연표

 

1) 연표-14

당나라의 상황

(출처: 신구당서 토번전 등 및 자치통감)

849

대중 3(849) 봄에 재상 상공열이 동도절도사(검남동도절도사를 지칭한다)를 죽이고, (), (), 안락(安樂) 3개 주()와 석문(石門), 목협(木硤) 7개 관()으로

통호하기를 청하니, 경원절도사 강계영이 이를 듣고, 태복경 육탐에게 명하여 가서 일을 처리하게 했다.

그 해 7월에 하(), ()의 장로들이 나이 많고 적은 사람 천여 명을 데리고 경사(장안)에 이르니, 황상이 직접 연희루(延喜樓)에 납시어 그들을 보았다. 이에 환호하고 춤추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또한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리에서 모자와 허리띠를 서로 잡아당기니, 그 후에 황상이 명하여 좋은 곳을 선정하여 [이들을] 그곳에 살도록 했다. 보는 자들이 모두 기뻐하며 만세를 외쳤다.<구당서 토번전 끝.>

 

찬하여 말한다. “서융의 땅에서는 토번이 가장 강했다. 주변국을 잠식하고 중국의 강역에 활개를 펼치니, 때로는 반란을 일으키고, 때로는 복속되었고, 혹은 움츠리고, 혹은 펼쳤다. 예의는 비록 갖추었으나 그 본성은 시랑(豺狼)과 같았다.”

<구당서 토번전 찬>

 

()비비(婢婢)가 하원에 주둔하였는데, 상공열이 ()()를 건너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그를 공격하였으나 상공열에게 패했다. ()비비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교량을 지켰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여 다리를 불태우고 돌아왔다. 상공열은 좁은 길을 통해 계정령관(雞頂嶺關)으로 나와 협곡에 다리를 만들어 ()비비를 공격하였다.

백토령(白土嶺: 청해성 서녕 남쪽)에 이르러 [상비비의] 장수 상탁라탑장을 패퇴시키고 이우협(犛牛硤)으로 들어가 싸웠다. ()비비의 장수 촉로공력이 산협을 끼고 진지를 고수하여 상공열을 곤궁하게 만들고자 하였는데, 대장 마리비자가 따르지 않자 병이 있다고 사직하고 먼저 돌아갔다. 마리비자가 급히 상공열을 공격하였으나 그 일전으로 전사하였다. ()비비는 군량이 다해 무리를 이끌고 감주(甘州) 서쪽 변경으로 향했고, 탁발회광에게 지키게 했는데 상공열 휘하의 다수가 그에 귀부하였다.

 

상공열이 선주(), 곽주(), 과주(), 숙주(), 이주(), 서주(西) 등지를 크게 노략질하였는데, 지나가는 곳마다 포로를 삼거나 살륙하니, 시신이 어지러이 쌓여 있었고, 휘하 병사들은 안으로 원망하면서 모두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 때 [상공열은] 거짓으로 장차 당의 병사 50만을 청하여 이 난을 수습할 것이라고 하고, 위주(渭州)를 점거하여 찬보에 책립되기를 원하여, 표문()을 받들어 당에 귀부하였다. 선종(宣宗)은 조서를 내려 태복경 육탐에게 부절을 가지고 가서 [상공열을] 위로하도록 하고, 경원(涇原), 영무, 봉상, 빈녕, 진무(振武) 등의 병사로 하여금 [상공열을] 도와 영접하도록 했다. 상공열이 이미 도착하자 상서좌승 이경양에게 조서를 내려 그가 원하는 것을 묻게 했다. 상공열은 매우 오만하여 하위절도사가 되고자 하였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귀환하는 길에 함양교를 지나며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거사를 일으키고 오직 바란 것은 이 강을 건너 당과 경역을 나누고자 했을 뿐이다.” 이에 다시 낙문천(落門川)으로 향해 흩어진 병졸을 거두어 장차 변경을 침범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오랜 비를 만나 양식이 끊겨 상공열은 곽주(廓州)로 도주하였다.

 

이때 봉상절도사 이빈이 청수(淸水)를 회복했다. 경원절도사 강계영이 원주(原州)를 회복하고, 석문 등 6개의 관()을 얻었으며, 사람과 가축 수만을 얻었다. 영무절도사

이흠이 안락주(安樂州: 영하성 중위현)를 얻으니 조서를 내려 이를 위주(威州)라고 했다. 빈녕절도사 장흠서가 소관을 회복했다. 봉상(鳳翔)이 진주(秦州)를 아울렀다. 산남서도절도사 정애가 부주(扶州)를 얻었다.

<신당서 토번전>

 

토번의 논공열은 하주에 진을 치고, 상비비는 하원군에 진을 쳤는데 상비비의 여러 장수들이 논공열을 치려고 하자 상비비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여러장수들이 논공열을 쳤으나 패배하여 상비비는 남은 무리를 거두어 황하의 다리를 불사르고 선주로 돌아갔다.(2)

 

토번의 진주() 원주() 안락주(安樂)3개주()와 석문 등 7개관()이 투항해 옴(2)

< 7개관(): 원주(原州)의 석문(石門), 역장(驛藏), 제승(制勝), 석협(石峽), 목정(木靖), 목협(木峽),

육반칠(六磐七)>

노룡에서 주문을 올려 절도사 장중무가 사망하였고, 그 아들 절도압아 장직방을 세웠다고 하였다

(49) 장직방을 노룡유후로 삼았다(414),

 

서주(무녕절도)에서 군대가 난을 일으켜 절도사 이곽을 쫓아냈다.

의성절도사 노홍지를 무녕절도사로 삼았다. 노홍지가 이들을 안정시켰다(5)

 

장직방을 노룡절도사로 삼았다(626)

경원절도사 강계영이 원주(原州)와 석문, 역장, 목협, 제승, 육반, 석협의 6개 관문을 빼앗았다.(6)

 

영무절도사 주숙명이 장락주를 빼앗았다(76) 빈녕절도사 장군서가 소관을 빼앗았다.(13)

봉상절도사 이빈이 진주를 빼앗았다(23)

장락주를 위주(威州)로 고침(84)

비변고(備邊庫)를 연자고(延資庫)로 고침(10).

서천절도사 두종이 유주(維州) 빼앗았다고 보고(10)

노룡(盧龍)절도사 장직방은 군사들이 반란하려하자, 장안(長安)으로 도주

군사들이 아장 주침을 노룡유후로 추대(11)

애주(崖州) 사호 이덕유 사망(1210).

산남서도절도사 정애가 부주(扶州)를 빼앗앗다고 보고(12)

 

<이상 자치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