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은 中 요서에 있었다" "이곳서 낙랑 유물 나온 적 있나"
출처: 조선일보, 입력 : 2016.08.22 03:00
[강단·재야 사학자 遼西 합동 답사… 낙랑군 위치 둘러싸고 격론 벌여]
재야 "낙랑군·교군 모두 요서에" 강단 "한사군 때 요서는 수몰 지역"
"중국 역대 사서(史書)에는 이곳에서 북쪽 40리에 한나라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 부근에서 이제까지 한나라 낙랑군의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된 적이 있습니까?"(정인성 영남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18일 오후 동북아역사재단 '중국 요서(遼西) 지역 답사단'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의 영평부성(永平府城) 유지를 찾았다. 낙랑군의 위치를 놓고 '한반도설(說)'을 주장하는 강단 사학자들과 '요서설'을 주장하는 재야 사학자들이 요서 현지에서 공동 조사하며 현장 토론회를 갖기 위해 마련된 답사였다. 강단 사학자는 공석구(한밭대)·정인성(영남대) 교수, 윤용구 인천도시공사 문화재담당관, 박준형 연세대 학예연구사, 재야 사학자는 이덕일 소장, 문성재 우리역사연구재단 책임연구원,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 고대사' 저자 황순종씨가 참가했고 이종찬 우당장학회 이사장,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강흥구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 등 상고사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인사들과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동행했다.
첫 답사지부터 시작된 의견 대립은 뒤이어 찾은 진황도시 창려현 갈석산(碣石山)에서도 이어졌다. 갈석산 역시 재야 사학자들이 "낙랑군 수성현엔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다"는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의 기록을 들어 낙랑군 영역으로 지목하는 곳이다. 하지만 공석구 교수는 "태강지리지는 진(晉)나라 태강 3년(282년)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그보다 뒷시기에 관한 기록들이 들어 있는 점으로 보아 후대에 가필됐으며 낙랑군 서술도 그 과정에서 들어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 사서들에 나오는 요서 지역의 낙랑군 관련 기록은 낙랑군이 313년 고구려에 멸망된 뒤 중국 요서 지역에 낙랑 유민들로 설치된 '낙랑교군(僑郡)'에 관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낙랑교군은 낙랑군 멸망 때 지배자였던 장통이 1000여가(家)를 이끌고 당시 요동 지역을 다스리던 모용외에게 귀부하면서 설치됐고 이후 요녕·하북성 지역을 옮겨다니면서 6세기 후반까지 존속했다.
답사 현장에서 시작된 열기는 숙소에서 진행된 세미나에서 본격적으로 달아올랐다. 이덕일 소장은 이 자리에서 강단 사학계의 '낙랑교군설'에 대해 처음으로 답변했다. "고대 요동(지금 요서 지역) 출신인 장통은 한반도는 구경도 못했다. 낙랑군과 낙랑교군은 모두 고대 요동 내에 위치했으며 낙랑교군설이 한반도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증거는 못 된다"는 것이다. 한편 윤용구 박사는 "중국 학계 연구에 따르면 이 지역은 전한(前漢) 무제부터 후한(後漢) 말까지의 유적·유물이 나오지 않는데 이는 당시 크게 범람한 바닷물에 200년 정도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낙랑군이 이 지역에 설치됐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토론에서 허성관 전 장관은 "자기 나라 역사는 보통 좋은 쪽으로 서술하는데 왜 우리는 불리한 자료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석구 교수는 "유·불리를 떠나 가능한 한 많은 사료(史料)를 연결시켜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학문"이라고 말했다.
다음 날에는 한족(漢族)과 이민족의 경계였던 산해관을 지나 요녕성 호로도시 수중현의 갈석궁(碣石宮) 유적을 찾았다. 갈석궁 유적은 남북 4㎞, 동서 3.5㎞의 거대한 건물터로, 중국 학계는 이곳을 진시황이 정복지를 둘러본 행궁(行宮)으로 보고 있다. 강단 사학자들은 진나라 영토가 이곳까지 미쳤기 때문에 한나라 때 그보다 남쪽에 낙랑군이 설치됐을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문성재 박사와 황순종씨는 "이곳이 진시황 행궁이라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고 주장했다.
답사단은 계속해서 내몽골 적봉시로 이동했다. 재야 사학자들은 기원전 2000년 무렵 만들어진 삼좌성 석성이 초기 고조선 유적이라고 말했지만 강단 사학자들은 그렇게 볼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박준형 박사는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녕성 조양에 있다가 심양으로 옮겼고 다시 평양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양쪽의 견해차는 여전히 컸지만 요서 지역이 한족과 고조선의 접경이라는 점은 함께 인정하는 등 소득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국 진황도·적봉=이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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