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개가한이 진무(振武)에 침입하자 유면이 인주자사 석웅과 도지병마사 왕봉을 파견하여 사타의 주야적심, 글필, 탁발의 3천 기병을 인솔하고 오개가한의 아장을 기습토록하며 유면은 대군을 가지고 그 뒤를 이었다. 석웅이 오개가한의 아장을 공격하니 오개가한이 달아나 석웅이 뒤를 쫓았다.(843년1월) 회골을 살호산에서 대파하여 가한은 상처를 입고 달아나서 석웅은 태화공주를 영접하여 돌아왔다 머리를 벤 것이 1만여 급이고 2만여명을 항복시켰다.(1월 11일) 오개가한이 달아나 흑차자족(黑車子族)을 지켰는데 그들의 무너졌던 병사들은 대부분 유주에 가서 항복 함(1월21일) 이사충(올몰사)의 귀의군(歸義軍) 철폐, 그 병사들을 여러 도(道)의 기병으로 분산시킴(2월), 할힐사 사자를 황상이 불러 마주하였는데 그 서열이 발해 사신보다 위에 있었다(2월15일) 당 무종이 조번으로 하여금 할힐사로 가서 안서와 북정을 요구하게 하니 이덕유 등이 안서는 장안에서 7천여리, 북정은 5천여 리이니 그곳을 얻는다해도 군사와 식량 등으로 경비를 써서 헛된 이름을 바꾸는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하자 그만 두었다. 할힐사가 책명을 요구하자 당 무종은 가한의 명칭을 덧붙여 내리면 신하의 예절을 지키지 않고 회골이 하였던 것처럼 해마다 물품을 보내고 말을 팔게 해달라고 요구할까 두려워 미적거렸는데 이덕유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상주하자 승낙하였다.(2월) 위박절도사 하중순에게 (하)홍경이라는 이름을 주었다.(2월) 유면이 “귀의군에 속한 회골 3천여명과 추장 43명을 여러 도에 예속시키자 호타하를 점거하고 명령에 좆지않아 그들을 죽였습니다. 회골사람 가운데 유주에 항복한 사람은 전후로 3만명인데 모두 분산시켜 여러 도에 예속시켰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3월) ◎ 소의(昭義.택로)절도 유진의 난(843년 4월~844년 8월) 소의절도사 유종간은 죽기 전에 하북에 있는 여러 번진을 본받기로 모의, 조카인 유진을 아내도지병마사로 삼고. 조카 유광주를 중군병마사로, 또한 몇몇 심복들에게 병사들을 나누어 거느리도록 하였다. 유종간이 얼마 후 죽었는데 유진은 비밀에 붙이고 자신을 유후로 삼도록 청하였다.(4월) 이 일을 재상과 논의하니 대부분은 회골 문제가 아직 남아있어 찬성하였으나 이덕유는 홀로 하삭의 3진은 멀고 이미 굳어져서 어쩔수 없으나 택로(소의절도)는 가까운 곳에 있고 유종간은 통제하기 어려웠고 조정을 위협했으며 거의 죽게되자 병권을 멋대로 그 아들에게 주었으니 여러 번진이 이를 본받으면 곤란하다고 반대함. 결국 이유덕의 뜻에 따라 유진을 토벌하기로 결정. 이에따라 성덕절도사 왕원규와 위박절도사 하홍경에게 유진을 돕지 말도록 조서를 내리고 4월19일에는 노룡절도사 장중무에게는 회골의 일을 맡긴다는 조서를 내렸다. 충무절도사 왕무원을 하양절도사로, 빈녕절도사 왕제를 충무절도사로 삼았다.(4월29일) 구시량은 황제가 미워함을 알고 늙어 병들었음을 핑계로 한직을 요구함.(4월) 당 무종이 유종간과 그의 아들 유진을 관직과 작위를 삭탈하고, 성덕절도사 왕원규, 위박절도사 하홍경, 하중절도사 진이행, 하동절도사 유면, 하양절도사 왕무원을 동원하여 성덕절도 유진을 토벌하도록 함.(5월13일) 왕무원이 보병과 기병 2천을 동원하여 천정관 남쪽 과두점에 진을 치니 유진이 친위군 2천을 동원하여 막도록함.(6월) 왕원규 이언좌 왕무원 하홍경에게 7월 중순 다섯 도로 일제히 전진하라고 명령하자 유진이 항복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6월19일) 토번의 논공열은 나라를 찬탈하려고 토번의 선주절도사 상비비를 죽이려고 함. 논공열이 상비비를 공격. 산남동도절도사 노균을 소의절도초무사로 삼았다.(7월) 진강행영절도사 이언좌가 서주를 출발하였으나 행군이 매우 느슨 천덕(天德)방어사 석웅을 이언좌의 부관으로 삼아 그를 대신하게 함. 석웅을 진강행영절도사로 삼고 이언좌에게 익성에 주둔하도록함(7월 18일). (각 절도사들이 이전처럼 미적미적하며 진격안함) 소의의 대장인 이비, 항복(8월9일) 하양절도사 왕원규의 선봉이 형주(하북성 형대시)에 들어간지 한달이 넘었으나 위박절도사 하홍경이 아직도 군대를 보내지 않자 왕원규는 왕홍경이 양다리를 걸쳤다고 보고. 충무절도사 왕재에게 정병을 뽑아 자주(磁州)로 가도록 함.(8월11일) 유진의 부하 설무경이 과두채(科斗寨)를 깨뜨리고 하양의 대장 마제 등을 사로잡았으며 작은 영채 17개 불사르고 약탈하였는데 회주(懷州)에서 겨우 10여리였다.(8月18日) 하양절도사 왕무원이 만선에 진을 치자 유진은 아장인 장거와 유공직 등을 파견하여 설무경을 만나 함께 이들을 공격케 하고 9월1일에 만선을 포위하도록 기약함. 유공직 등은 만선의 남쪽 5리를 지나 옹점(하남성 심양시)을 불살랐다.(8월29일) 이때 마침 의성군(義成軍)이 도착하니 하양절도사 왕무원이 태행산으로 도주함. 위박軍 하홍경이. 비향(肥鄕)과 평은(平恩)을 뽑고 죽이거나 부상시킨 사람이 많았다고 보고(9월7일). 왕무원이 죽었다는 보고가 있었음.(9월20일) 무종이 하남윤 경흔을 하양(河陽)절도사·회맹(懷孟)관찰사로 삼음(9월22일) 이언좌를 대신하여 석웅을 진강행영절도사로 삼았다.(9월24일) 토번의 논공열과 상비비가 하주에서 싸워 논공열이 대패하여 단기로 달아났다. 석웅이 군사를 끌고 오령을 넘어 5개의 영채를 깨뜨리고 죽이고 잡은 사람이 1천명. 유면을 의성절도사로 삼고 형남절도사였던 이석을 하동절도사로 삼았다.(10월16일) 당항이 염주를 노략질하자 예전에 무녕절도사였던 이언좌를 삭방의 영염절도사로 삼았다.(10월) 안남경략사 무혼이 장사를 부려 성을 수리하였는데 장사들이 난을 일으켜 무혼은 광주로 달아나고 감군 단사칙이 안정시켰다. 공을 세웠던 설무경은 유진이 포상하지 않자 충무절도사 왕재와 은밀히 모의하고 12월3일 왕재가 천정관을 공격하니 조금 싸우다 달아나고 왕재가 천정관에서 이기고 그곳을 지켰다. 설무경이 택주로 달아나 왕재에게 공격케하고 안에서 호응하겠다고 하였으나 왕재가 의심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유진이 이를 눈치채고 설무경을 유혹하여 노주로 오게하여 죽이고 유공직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왕재가 택주를 공격하여 유공직과 싸웠으나 유공직이 이기자 유공직이 기세를 타고 천정관을 회복하였다.(12월14일) 왕재는 나아가 유공직을 쳐서 대파하고 능천을 포위하여 승리하였다.(12월20일) 하동애서 석회관(石會關)에서 이겼다고 보고함(12月20日) 횡수책(橫水柵)의 도장(都將) 양변과 1천5백 수졸. 처우불만, 소의군(軍) 토벌에 경내가 텅비고 징발되자, 태원(太原)에서 반란 <이상 자치통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