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62,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06, 6. 토번의 침공 이후-6)

상 상 2016. 8. 10. 20:30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62,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06, 6. 토번의 침공 이후-6)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6. 토번의 침공 이후

1) 연표

 

1) 연표-6

당나라의 상황

(출처: 신구당서 토번전 등 및 자치통감)

832

무녕절도사 왕지흥을 충무절도사로 빈녕절도사 이청을 무녕절도사로 삼았다(38)

회골의 소례 가한이 그의 부하에게 살해되고 조카인 호특륵을 세웠다.

이청이 굳게 사양하자 충무절도사였던 고우를 무녕절도사로 삼았다(328)

 

검남서천절도사 이덕유. 대도수(大度水) 북쪽 공협관(邛崍關) 수리,

수주(巂州) 치소 대등성(台登城)으로 옮겨달라고 주문(832512)

형남절도사 단문창을 서천절도사로 삼았다(1127)

중서시랑 우승유. 입지 좁아지자, 스스로 회남절도사로 내려감(127).

서천절도사였던 이덕유를 병부상서로 삼았다.

 

< 이상 자치통감 >

833

무녕절도사 고우가 교만한 사졸들을 통제할 수 없자, 영남절도사 최공을 무녕절도사로 삼았다(126)

당 문종이 병부상서 이덕유와 붕당에 관한 일을 의논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조정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 3분의 1은 붕당입니다.”라고 하였다.(228)

 

회골의 새로운 가한을 책봉하여 애등리라율몰밀시합구록비가창신 가한으로 삼았다.(429)

 

산남서도절도사 이재의를 하동절도사로 삼았다.(613)

이보다 앞서 회골이 매번 공물을 바치면서 거치는 곳에서 해롭게 하고 약탈해 갔지만 주현(州縣)에서는 감히 따져 묻지 못하고 다만 병사들을 삼엄하게 하여 방위만 할 뿐이었다.

중서시랑 이종민. 산남서도절도사로 좌천(833619)

선무절도사 양원경이 병이나 이정을 선무절도사로 삼았다.(7)

충무절도사였던 왕자흥을 하중절도사로 삼았다(112)

 

문종이 중풍들어 처음 말을 할수없었는데, 정주의 약을 먹고 효험이 있어, 정주를 총애(1218)

 

<자치통감)

834

왕수징, 이중언, 정주는 모두 이덕유를 미워하였는데 산남서도절도사 이종민이 이덕유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이종민을 끌어당겨서 그를 대적하게 하였다(83493)

 

유주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 양지성과 감군 이회오를 내쫓고 병마사 사원충을 추대하였다.

(104)

 

이종민을 중서시랑 동평장사로 삼고.(8341013),

이덕유를 산남절도사로 삼았으나(1017)

이덕유가 황상을 알현하고 사울에 남아있기를 청하자 이덕유를 다시 병부상서로 삼았다(1029)

 

성덕절도사 왕정주가 죽자 군중(軍中)에서 그 아들인 왕원규를 지유후로 하였다(11)

양지성 문종에 주살됨(1121)

 

다시 이덕유를 진해절도사로 삼았다.(1129) 이 당시 이덕유와 이종민은 각기 붕당을 가지고 서로 밀어내고 끌어당겼다. 황상은 그것을 걱정하고 매번 탄식하며 말하였다. “하북의 도적을 내쫓는 것은 쉬우나 조정에 있는 붕당을 없애는 것은 어렵구나!”

 

이중인이 이름을 훈으로 고치게 해 달라고 청하엿다.(1130)

 

유주(幽州)에서 박주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자사 장원범의 행방을 모른다고 보고함.

사원충을 노룡유후로 삼았다(127)

 

<이상 자치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