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4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89, 5. 토번의 침공-41)

상 상 2016. 6. 27. 17:40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4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89, 5. 토번의 침공-41)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1) 연표

 

1) 연표- 41

기 사

872

[함통] 13(872) [장의조가] 죽었다. 사주(沙州)는 장사(長史) 조의금에게 담당하게 하였고, 곧 귀의절도사에 임명했다. 이후 중원에 많은 일이 발생하여 왕명이 이르지 못하니, 감주(甘州)는 회골에 병탐되었고, 귀의(歸義)의 모든 성도 다수 함락되었다.<신당서 토번전>

혼말(渾末)은 올말(嗢末)이라고도 하는데, 토번의 노예 부락이었다. 토번의 법에 출병할 때는 반드시 호족에서 징발하도록 하였으니, 모두 노예로 종군하게 하였고, 평시에는 흩어져 살며 농사와 목축에 종사했다. 상공열의 반란을 맞아 돌아갈 곳이 없었는데 서로 불러 모으니 수천 명에 이르러, 올말(嗢末)이라고 자칭하고, 감주, 숙주, 과주, 사주, 하주(), 위주(), 민주(), 곽주(), 첩주(), 탕주() 사이에 거주하였는데 토번 아장(牙帳) 근처에 있는 자가 가장 용맹했고, [그들의] 말도 매우 우량했다.<신당서 토번전 끝.>

 

찬하여 말한다. “당이 흥하여 사방의 오랑캐가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모두 군대를 내어 정벌하고, 그들의 아장(牙帳)을 짓밟았으며, 조정을 갈아엎은 후에야 그만두었다. 오직 토번, 회골만이 강성함을 떨쳐 중국의 걱정거리가 됨이 가장 오래되었다. 젠뽀는 하(), () 전역을 빼앗고, 경사의 근교까지 접근하여 동쪽의 국경을 삼았으며, 경사를 침범하고 주변을 약탈하면서 화인(華人)을 잔인하게 도륙했다.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가 모여서 살피고 함께 계책을 논의했으나 문제의 핵심을 찾아내지 못했다. 뒤늦게 토번과 회골이 스스로 망했으나 당도 역시 쇄하였다. 무릇 밖으로 위무하고 안으로 편안하게 해야 한다고 했으니, 이는 오직 성인만이 양보하지 않은 일이다. 현종은 높은 덕의 소유자였으며, 너른 영토를 개척하고, 먼 곳의 공에 힘썼으나, 가까이의 근심을 홀시하여, 역적이 일어나고, 중원이 분열되어, 이백 년간 수복할 수 없었으니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먼저 안으로 다스리고 나서 사방 오랑캐의 외환을 없애는 것이 이미 이룩한 성취를 지키는 좋은 계책이다.”<신당서 토번전 찬>

873

[함통(咸通)] 14(873)에 탄작이 다시 촉에 침입하였다.

배를 연결하여 대도하(大度河)를 건넜는데, 자사 황경복(黃景復)이 이를 공격하여 물리쳤다. [그들] 무리가 대도하를 따라 남하하여, 밤에 상류를 뗏목으로 건넌 군대와 함께 물가의 여러 둔영을 협공하니, ()경복이 패주하여 여주(黎州)로 돌아 왔다. (: 남조)이 뒤를 밟아 추격하다가 오히려 ()경복에게 패하였다.

마침 만(: 남조)[황경복을] 뒤쫓아 오다가 되돌아가 대도하를 공격하였다. [()] ()를 누이고 북소리를 멈추며 청하여 말하기를, “탄작이 천자에게 글을 올려 억울한 일을 아뢰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둔영의 병사들이 이를 믿고 싸우지 않았다. 다리가 완성되어 [남쪽에 있던 만이 대도하(大度河)] 건너와, 여주(黎州)가 함락되었으며. [만이] 마침내 아주(雅州)를 공격하여 정변군(定邊軍)을 치니, 사졸들이 붕궤되어 공주(邛州)로 들어갔다.

[이 소식으로] 성도가 크게 진동하여, 사람들은 도망하여 옥루관(玉壘關: 성도의 북쪽에 위치)으로 들어갔고 병사들은 성벽으로 올라갔다. 탄작이 사자 왕보성(王保城) 40인을 보내 표신(驃信)의 서한을 가지고 가서 절도사 우총(牛叢)에게 전하였는데, 길을 빌려 입조하고자 하니, 촉왕의 옛 궁궐에서 쉬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우총이 허락하려 하자, 양경(楊慶)이 간하여 말하기를, “만들은 신의가 없으니, 저들이 예를 낮추고 말을 달콤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속이려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그 사자를 베고, 두 사람만 남겨 서찰을 돌려보내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우총이 [만의 사자를] 책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조왕의 조상은 육조(六詔) 가운데 가장 작은 이()였다. 천자께서 그 근실함을 기억하시고는 육조를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 주고, 성도에 부용(附庸)이 되게 하여 ()’의 명칭을 붙여 주었다. [게다가] 자제가 태학에 입학하는 것을 허락하여 중화의 풍속을 익히게 하였다. [그런데도] 오늘날 왕명을 스스로 저버렸다. 참새와 뱀, 그리고 개와 말조차도 은덕에 보답할 줄 아는데, 왕은 벌레와 새만도 못하지 아니한가? 근자에 성도가 방비를 미처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너희들로 하여금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너희는] 비교(毗橋), 타강(沱江)에서 패하고, 성 가까이 시체를 쌓아 둔 지 4년도 되지 않아 다시 왔다. 지금 나에게는 10만의 무리가 있고, 그 절반은 놔두고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상태이다. 1,000인으로 군()을 삼고, 열 개의 군으로 부()를 삼아, 뛰어난 장수들이 그것을 맡고 있다. 대체로 한 부마다 강노(强弩)를 쓰는 병사가 200 있는데, 박부(鎛斧)가 그것을 보좌하며, 또 경궁(勁弓)을 쓰는 병사가 200이 있고, 월은도(越銀刀)부대가 보좌한다. 그리고 장과(長戈)를 쓰는 군사가 2백 있는데 철도(掇刀)가 보좌하며, 또 단모(短矛)를 쓰는 병사가 200 있는데, 연추(連鎚)[부대가] 이를 보좌한다. 또 군대를 4()으로 나누었는데, 각 면마다 철기(鐵騎)5백씩 있다. [그리고 우마를 먹일] 꼴과 땔나무, 미속(米粟), 우마(牛馬), , 돼지를 모두 거두어 들여 들판을 비우고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또한 양측의 기병대를 가지고 너희의 땔나무와 채소를 빼앗을 수 있다. 나는 해가 뜨면 1부의 병사를 내보내 너희와 싸울 것인데, 부를 2교대로 나누어 해가 중천에 뜰 때 교대할 것이다. 또 해가 지면, 또 한 부가 이르러 밤새 진칠 것이다. 달이 밝으면 싸우고 어두우면 쉴 것이며, 한밤이 되면 교대할 것이다. 무릇 나의 병사들은 5일에 한 번씩 적을 죽일 것인데, 너희들은 밤낮으로 싸워야 할 것이니, 열흘도 못되어 정신이 흐릿하게 되어 장차 죽게 될 것이다. 주현(州縣)에서는 갑옷을 수선하고 무기를 갈아, 앞뒤 양쪽으로 서로 따르게 할 것이다. 모두 만에게 원한이 깊으니, 비록 여자라도 능히 입을 다물고 이를 갈며 적을 칠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강건한 장부나 열사는 오죽하겠는가? 너희 조상이 일찍이 [서번(西蕃)]에 대해 노비가 되어 섬긴 적이 있으니 너희의 원수가 된다. 지금 도리어 그들에게 신하노릇을 하니, 이 얼마나 원수와 은혜가 어긋난 것인가? 촉왕(蜀王)의 옛 궁궐은 선대의 소중한 궁궐이니, 변방의 만이가 머물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다. [만약 머문다면] ()이 노하고 사람이 성을 내어 표신(驃信)은 장차 죽을 것이다!” 우총(牛叢)은 오히려 근교의 민가와 누각을 불태우고 군대를 엄중하게 단속하여 굳게 지키는 계책을 썼다. 탄작이 신진(新津)에 이르렀다가 군대를 돌려 검중(黔中)을 침략하였다. 경략사 진광모는 두려워 형남(荊南)으로 달아났다.

마침 () 희종이 즉위하여 금오장군 한중에게 절()을 가지고 사자로 가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조가] 여주(黎州)를 공격하였는데, ()경복(景復)이 이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신당서 남조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