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깨비와 싸운 지난 4년
출처: 조선일보, 입력 : 2016.06.03 03:00
집권 후반기 내리막길을 달려가는 박근혜 정부는 점점 마감 시한에 쫓기고 있다. 140개 국정과제를 135조원의 공약 가계부에 담겠다는 임기 초 구상은 거창했지만, 지금 국민 머리에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4년 전 공약을 제발 좀 덜어내고 핵심에 집중하라는 각계의 조언에 귀를 닫았을 때 느꼈던 불안했던 예감은 현실이 되고 있다. 이대로 가면 현 정부는 재정·노사·부동산 등 100개가 넘는 로드맵만 만들다 결국 '로드맵 정부'란 비아냥거림만 받고 끝난 노무현 정부와 같은 운명을 맞을지 모른다.
현 정부의 공약은 열등생의 시험공부 계획과 닮았다. 의욕 넘친 진도표만 있을 뿐, 날림 실천으로 제대로 끝낸 것 없이 달력만 넘기고 있다. 가파른 언덕길에서 수레를 밀어올리듯 땀을 뻘뻘 흘리는데 왜 손에 잡히는 성과는 없는 것일까. 설명의 단초는 4년을 끌다 지난 국회에서 폐기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서비스법)을 둘러싼 논란을 들여다보면 조금 잡힌다.
19대 국회에서 정부와 여당은 이 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서비스업 발전은 물 건너간다고 배수진을 쳤다. 반면 야당은 의료 민영화를 위한 획책이라고 결사반대했다. 이런 야당을 향해 대통령은 책상을 내리치며 울분을 토했고, 여당은 법안 통과의 발목을 잡은 선진화법을 헌법재판소까지 들고 갔다. 하지만 이 법을 아는 사람들은 과연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싸울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표시한다.
서비스법은 그야말로 기본법에 불과해 이 법이 통과되어도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서비스법은 30개가 넘는 법률로 분산된 서비스업의 계획과 지원 조치를 통합 조정하기 위한 법이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모두 개별법을 고쳐야만 가능하다. 가령 야당의 우려대로 정부가 의료 민영화를 하려 한다면 서비스법만 바꿔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보다는 의사들의 진료 거부를 금지한 의료법 15조, 국민의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한 국민건강보험법 5조 등을 바꿔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서비스법 통과만으로 정부가 할 수 있는 개혁정책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법이 통과되면 고용률이 70%로 오르고, 국민소득이 4만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선전해왔다. 양쪽 모두 명분과 감정에 사로잡혀 허깨비를 붙들고 알지도 못하는 싸움을 해온 것이다. 여야는 한번 이 법부터 통과시켜 보라. 장담하건대 의료 민영화도, 서비스업에 일자리가 봇물처럼 터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허깨비를 붙들고 씨름하다 아까운 국력과 시간을 낭비한 또 다른 대표적인 사례가 일반해고지침이다. 이 지침으로 노사정대타협까지 깨졌지만, 직장에서 바뀐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노조와 야당이 우려하는 '쉬운 해고'도 일어나지 않았고, 경영계와 여당이 기대했던 '고용 유연성'도 물론 확보되지 않았다. 현행 노동법 조문과 판례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고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조차 무서워 '공정인사지침'으로 지침의 이름이 바뀐 게 전부다. 현 정부 노동개혁의 몇 안 되는 성과의 실체는 이런 것이다.
20대 국회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바탕으로 먼저 정부가 들고 온 법안의 실체부터 파악해 보기 바란다. 다시 허깨비와 싸우며 남은 세월을 흘려보내기에는 우리 현실이 너무 어렵지 않은가..
박종세 사회정책부장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