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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 2년(822) 2월에 (토번이) 사신을 보내 경계를 정할 것을 청했다.
6월에 다시 사신이 입조했다. 염주에서 주를 올려 말하기를, “토번의 천여 명이 영무의 영내로 들어와서 병사를 보내 쫓아내고 진출을 저지했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당항에 국서를 보내려던 토번인 150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같은 달에 유원정이 토번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와서 주를 올려 말하기를, “지난 4월 24일에 토번 [찬보의] 아장(牙帳)에 도착했으며, 5월 6일에 회맹을 마쳤습니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유)원정이 토번에 왕래할 때는 하주(河州)를 경유하였는데, 그 도원수(都元帥) 상서령 상기심아가 말하기를, “회흘은 작은 나라이다. 우리가 병신년에 대막(大漠)을 건너 정벌하려고 추격하였는데, 성곽에서 이틀거리에 다다랐을 때, 바로 정벌해도 될 정도였으나, 본국(토번)의 찬보가 승하하셨음을 듣고 귀환했다. 회흘의 약함이 이와 같은데, 당(唐)의 대우가 우리(토번)에게 하는 것보다 후하니 그것은 왜인가?”라고 하여, 원정이 말하기를, “회흘은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었을 때 구해준 공훈이 있으며, 또한 일찍이 우리 국토를 조금도 침범하지 않았으니 어찌 후하게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때 (유)원정이 왕래할 때는 황하의 상류를 건넜는데, 홍제교에서 서남으로 2천여 리이며, 그 물이 매우 얕고 강폭이 좁아서 봄이면 옷을 걷어 걸어서 건넜고, 가을과 여름이면 배를 타고 건넜다. 그 남쪽 3백여 리에 산이 세 개 있는데, 산의 모양이 세 발 달린 평평한 냄비 같았고, 황하의 근원이 그 사이에 있어 물이 매우 맑고 차가왔다. [그러나] 여러 물길을 거치면서 물의 색이 붉게 되고, 계속해서 여러 물줄기가 흘러들어 점차 황탁해진 것이다. 또한 [황하의] 근원에서 서쪽으로 토번 열관(列館: 객관)과의 거리는 대략 4역(驛)에 해당되었는데, 매 역은 약 2백여 리에 해당된다. [황하의 근원에서] 동북으로 가면 막하연적미에 이르는데 폭이 50리이며, 남쪽으로 점차 협소해지고, 북쪽으로는 사주(沙州)의 서쪽에 이른다. 이윽고 남쪽으로 토(욕)혼국(吐渾國)으로 흘러들어가고, 이로부터 물줄기가 땅 밑으로 숨어들어, 예부터 이를 적미(磧尾)라고 했다. 이곳의 지리를 살펴보면, 대략 검남의 정서(正西)에 해당된다. 유원정이 처음 찬보를 민구로천에서 만났는데, [그곳은] 찬보의 하영지였고, 그 하천은 라사천(邏娑川:라싸천) 남쪽 백 리에서 장하(臧河)로 흘러들어갔다. 당시 토번이 사신 논실낙식 등을 보내 유원정을 따라 입조하여 사은하였는데, 태복소경 두재에게 명하여 토번에 사신으로 가서 답방하게 했다.
<구당서 토번전>
이듬해(장경 2년, 822) [토번이] 경계 획정을 요구해 유원정이 논눌라와 함께 토번에 가서 회맹하니 토번측 대신의 명단을 열거하여 문서에 기록했다. 유원정은 성기(成紀: 감숙성 천수현-天水縣), 무천을 지나 황하의 광무량에 도착했는데, 옛 성곽은 무너지지 않았고, 난주(蘭州) 땅에는 모두 메벼를 심고, 복숭아, 배, 유류(楡柳) 등이 무성하며, 백성들은 모두 당나라 사람으로 [당나라] 사신의 깃발과 당개(幢蓋: 양산과 유사하게 생긴 의례용 기구)를 보고 길로 몰려들어 바라보았다. 용지성(龍支城: 청해성 서녕시 동남)에 이르자 천여 명의 노인들이 무릎 꿇고 절하고 또 울면서 천자의 문안을 여쭙고 말하기를, “이전에 군대에 종군하여 이런 처지에 놓이니, 지금 자손들은 차마 당의 복장을 잊지 못하고 있는데, 조정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군대는 언제 옵니까?” 말을 마치고, 모두 통곡하였다. 몰래 이에 대해 물으니, [이들은] 풍주(豐州) 사람들이었다. 석보성을 넘는데, 그곳의 절벽이 가파르고, 길이 험하여 오랑캐는 이를 철도성(鐵刀城)이라고 불렀다. 서쪽으로 수십 리 길이 이어져 있으며, 흙과 돌은 모두 붉은 색이어서 오랑캐는 이를 적령(赤嶺)이라고 불렀다. 신안왕 (이)의(禕), 장수규가 정한 경계비가 모두 땅에 쓰러져 있었고(개원 17년-729년에 세운 경계비), 오직 오랑캐가 세운 비석만이 온전했다. 적령에서 장안까지는 삼천 리가 좀 넘으며, 이는 농우(隴右)의 옛 땅이다. 민달로천(悶怛盧川)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라사천(邏娑川)의 정남 백리에 위치해 있었고, 이곳은 또한 장하(臧河)가 흐르는 곳이었다. 장하의 서남쪽 땅은 마치 연마한 숫돌의 고운 부분처럼 평탄했고, 들판은 비옥했으며, 하천의 양안에는 정류(檉柳) 나무가 많았다. 산에는 백(柏) 나무가 많고, 산비탈은 모두 분묘로 가득했는데, 그 곁에는 가옥을 지어 붉은색을 칠하고 흰 호랑이를 그려두었으니 이는 모두 토번 귀족 중 전공을 세운 사람들인데, 이들은 살아서는 호피를 입고, 죽어서는 [이렇게] 용맹을 과시했으며, 순장자는 그 곁에 묻었다. 실결라령을 넘는데 그곳은 돌을 쫓아 차를 통하게 하였으니 이는 금성공주를 맞이했던 길이다. 미곡(麋谷)에 이르러 여관에 들어갔다. 장하(臧河)의 북천(北川)은 찬보의 여름 아장이 있는 곳이다. 창(槍)으로 목책을 삼아 주위를 두르고, 10보마다 매우 긴 삭(槊)을 세워 두었으며, 가운데에는 큰 깃발을 꽂아 세 개의 문을 만들었는데, 문 사이의 거리는 모두 백 보였다. 무장한 군졸이 문을 지켰고, 새 깃털 모자와 호피 혁대를 두른 무축(巫祝)이 북을 두드리고 있었으며, 대개 문으로 들어서는 모든 사람은 몸수색을 한 후 들어갈 수 있었다. 가운데에 높은 대(臺)가 있었고, 주변에는 보석으로 장식한 방패가 둘러져 있었으며, 젠뽀는 장막 가운데에 앉아 있었고, 장막 안에는 황금으로 장식한 교리(蛟螭), 호표(虎豹)가 놓여 있었는데, 젠뽀는 흰색 갈(褐)로 된 옷을 입고 있었고, 조하(朝霞)를 묶어 머리를 가리고, 금으로 조각한 칼을 차고 있었다. 발체포(鉢掣逋)가 오른쪽에 서 있었고, 재상들은 단상 아래 열 지어 있었다. 당의 사신이 처음 이르렀을 때, 급사중 논실답열이 와서 회맹에 대해 논의했고, 아장의 서쪽에서 크게 연회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습관과 거의 비슷했다. 「진왕파진곡(秦王破陣曲)」을 연주하고, 또 이어서 「양주(涼州)」, 「호위(胡渭)」, 「녹요(錄要)」와 그 외 여러 곡을 연주하였다. 또한 여러 기인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모두 중국인이었다. 회맹단의 넓이는 10보이고, 높이는 2척이었다. 사신과 토번의 대신 10여 명이 서로 마주서고, 추장 백여 명이 회맹단 아래에 앉았다. 회맹단 위에는 큰 탑(榻)을 설치하고, 발체포가 올라 회맹을 고하니, 한 사람이 곁에서 번역하여 아래에서 전해 들었다. 삽혈(歃血: 회맹할 때 희생한 동물의 피를 모아 회맹에 참여한 사람들이 돌아가며 입술에 적시는 행위)을 하였으나 발체포는 삽혈하지 않았다. 회맹이 끝난 후, 불상 앞에서 다시 맹세하고 울금수(鬱金水)를 마시고 사신과 함께 서로 경하한 후 단에서 내려왔다.
유원정이 돌아올 때, 토번의 원수(元帥) 상탑장이 대하천(大夏川: 하주-河州의 남쪽으로, 감숙성 임하현 동쪽)의 숙소까지 배웅하고, 동방을 관할하는 여러 장군 백여 명을 불러, 회맹의 문서를 펼쳐 놓고, 그 내용을 두루 알리며, 또한 각기 변경 수비에 경계할 것이며, 서로 침범하지 말도록 명령했다. 회맹문에는 이태(彝泰: 이태는 토번의 연호) 7년이라고 썼다. 상탑장이 유원정에게 말하기를, “회골은 작은 나라이고, 우리가 일찍이 토벌한 적이 있으며, [우리가 회골의] 도성으로부터 3일 거리까지 이르러 공격하려고 할 때 국상(國喪)을 만나 귀환하였으니 그들은 우리의 적수가 아니다. 그런데 당은 왜 그들을 두려워하고 후하게 대하는가?”하니, (유)원정이 말하기를, “회골은 공이 있고 우리와 화약을 맺어 조금의 땅도 마음대로 공격하여 취하지 않았으니 이로써 후하게 대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탑장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원정이 황수(湟水)를 건너고 용천곡에 이르러 서북으로 살호천을 바라보니, 당초 가서한이 쌓은 방벽이 많이 남아 있었다.
황수(湟水)는 몽곡(蒙谷)에서 발원하여 용천(龍泉)에 이르러 황하와 만난다. 황하의 상류는 홍제량(洪濟梁)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이천 리 거리에 있고, 물길은 점점 좁아져, 봄에는 걸어서 건널 수 있고, 가을과 여름에는 배를 타고 건널 수 있다. 그 남쪽 삼백 리 지점에 3개의 산이 있는데, 가운데는 높고 사면은 낮아 이를 자산(紫山)이라고 부른다. 곧장 대양동국(大羊同國)으로 통하며 예전에 곤륜(崑崙: 산맥)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토번은 이를 민마려산(悶摩黎山)이라고 부르는데, 동쪽으로 장안과 5천리 거리이며, [민마려산] 산중에 황하의 발원지가 있어, 푸른 물이 굽이쳐 완만히 흐르고 마침내 여러 물줄기가 모이는데, 물색은 적색으로 변하고, 멀리 흘러 갈수록 여러 물줄기가 유입되어 탁해지니 그런 까닭으로 세상 사람들이 서융의 땅을 하황(河湟)이라고 불렀다. 황하 발원의 동북은 곧 막하연적미(莫賀延磧尾: 막하연적은 현재 哈密와 돈황 사이에 위치한 합순 사막을 지칭한다)와 5백리 거리인데, 사막의 넓이는 오십 리이며, 북쪽으로는 사주(沙州)로부터, 서남쪽으로는 토욕혼으로 들어가면서 점차 좁아들어 그런 까닭으로 적미(磧尾)라고 불렀다. 대강 그 땅의 위치를 살펴보면, 대개 검남(劍南)의 서쪽이다. 유원정이 보고 겪은 일이 대략 이와 같았다.
<신당서 토번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