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34,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78, 5. 토번의 침공-30)

상 상 2016. 5. 27. 20:38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34,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78, 5. 토번의 침공-30)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1) 연표

 

1) 연표- 30

기 사

821

 

장경 원년(821) 6월에 청새보(靑塞堡)를 침입하였는데, 이는 우리(당나라)와 회흘(回紇)이 화친한 까닭이었다. 염주자사(鹽州刺史) 이문열이 병사를 일으켜 이를 물리쳤다. 9월에 토번이 사신을 보내 회맹을 청했고, 황상이 이를 허락했다.재상(宰相)이 이 일을 정중하게 처리하고자 태묘에 고하기를 청하였는데, 태상예원에서 주를 올려 말하기를, “삼가 ()숙종과 ()대종의 선례를 살펴보면, 토번과 회맹할 때 모두 태묘에 고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덕종, 건중 말년에 토번과 연평문(延平門)에서 회맹할 때 그 성신(誠信)을 중히 여겨 특별히 명하여 태묘에 고한 적이 있습니다.정원 3(787)에 이르러, 평량(平涼)에서 회맹할 때 역시 태묘에 고했다는 기록은 없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이 일은 일시적인 것으로 상례는 아니며, 전례(典禮)에서 구해 보아도 관련된 기록이 없습니다. 지금 삼가 상세히 살펴보니, 태묘에 고함은 적합하지 않은 듯합니다.”라고 하여, 이를 따랐다. 이윽고 대리경 겸 어사대부 유원정에게 서번회맹사(西蕃盟會使)에 충임하도록 하고, 병부랑중 겸 어사중승 유사로를 부사로 삼았으며, 상사봉어 겸 감찰어사 이무, 경조부 봉선현승 겸 감찰어사 이공도를 판관으로 삼았다.

1010일에 토번의 사신과 회맹하니, 재상과 신료 및 우복야 육조상서, 중집법, 태상, 사농경, 경조윤, 금오대장군이 모두 참석했다. 회맹의 글에서 말하기를, “()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리니, 위엄과 교화가 이른 곳마다 입조하지 않음이 없었다. 삼가 주의를 기울이고 대업에 경주하며, [나라가] 전복됨을 두려워하였고, 문무의 전통을 이어받아 영광과 기쁨을 거듭 쌓았으며, 깊은 지혜를 명현하게 하여 황제의 업을 더럽힘이 없기를 12대를 이어 204년에 이르렀다. 우리 태조(太祖)는 황제로서의 운명을 받아 쥐고, [나라의] 근간을 공고히 하였으며, 그의 명성이 세상에 퍼져 영구하게 되었고, 상제(上帝)에게 제사 드리니 화답하시기가 매우 상서로웠으며, 황령(皇靈)에 봉사(奉祀)하니, 큰 복을 베푸셨다. 어찌 [우리가] 태만할 수 있겠는가? 때는 바야흐로 계축년(장경 원년이 계축년임) 겨울 10월 계유일(10)에 이르렀는데, 문무효덕황제(당 목종)가 조를 내려 승상 신하 최식, 신하 왕파, 신하 두원영 등이 대장 화번사(和蕃使) 예부상서 논눌라 등과 경사(京師: 장안)에서 회맹하였는데, 회맹단은 도성의 서쪽 교외에 두고, 구덩이는 단의 북쪽에 파도록 했다. 대략 [진행 순서를 살펴보면,] 맹서문을 읽고, 희생을 죽이고, 희생 위에 맹서문을 붙이고, 복양(復壤), 척강(陟降), 주선(周旋)의 예를 차례로 거행함에 조금도 거스름이 없었으니, 이는 대개 전쟁을 멈춰 백성을 쉬게 하고, 결혼 관계를 중히 여겨 상호 좋은 관계를 지속하며, 힘써 원략(遠略)을 세우고, 먼 이익을 도모한 까닭이다. 원래 푸른 하늘은 위에 있고, 누런 땅은 아래에 있듯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무리들은 반드시 관아에 의지하여 필요한 것을 얻고 또 그곳에 신속되기 마련이지만, 잠시라도 강령이 없으면 곧 서로 다투어 절멸되기 마련이었다. 현재 중원을 통치하는 자는 오직 당()의 군주뿐이며, 서쪽 변방에서는 대번(大蕃:토번)이 주인이다. 오늘 이후로, 전쟁은 물리고, 오랜 원한은 일거에 없애도록 하여, 삼촌과 조카 관계를 중히 여기고, 옛날처럼 서로 힘을 모아 돕도록 한다. 이에 변방의 요새는 경계를 중지하고, 봉수대는 다시 불을 피우지 않으며, 어려운 일은 서로 돕고, 사납게 약탈하는 일은 다시 하지 않으며, 당과 토번 양측 변경 요새를 서로 침입함을 그만두도록 한다. 옷깃과 허리띠처럼 산천이 빙 둘러쳐진 요충지를 삼가 옛날과 같이 굳게 지키고 있어, 서로 속일 것이 없으니, [또한] 서로 근심할 것도 없다. ! 사람을 아끼는 것은 인()으로 하고, 경계를 지키는 것은 신의로 한다고 하였으며, 하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로 하며, 신을 섬기는 것은 예로 한다고 하였으니, 만약 그 중 하나라도 온전히 하지 못한다면 곧 재앙이 자신에게 닥칠 것이다. 변경의 산은 높고, 물은 굽이쳐 흐르며, 일신(日辰)이 길할 때, 두 강역을 정하니, 서쪽은 대번(大蕃:토번)이요, 동쪽은 거당(巨唐:당나라)이 자리하였다. [우리] 대신이 문서를 가지고 서방에 널리 알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번(大蕃:토번)의 찬보 및 재상 발천포, 상기심아 등이 앞서 보낸 회맹의 글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토번과 당 두 나라는 각자의 영토를 지켜, 서로 정벌하지 않고, 토벌하지 않으며, 서로 침범하여 되갚지 않고, 도모하여 상대방의 변경을 침입하지 않도록 한다. 만약 의심되는 점이 있거나, 백성이 월경하는 일로 묻고자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의복과 식량을 주어 돌려보낸다.” 지금까지도 하나하나 의거해 따르고, 다시 첨가하거나 고침이 없었다. 회맹에 참석한 관원은 모두 17명으로, 문서에 이름을 열거하여 서명했다. 그 중 유원정 등은 논눌라와 함께 토번에 가서 [토번에서 거행된] 회맹에 참석했는데, 황상이 유원정에게 칙유를 내려 그곳에 가면 재상 이하 관원으로 하여금 문서의 뒷면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영무절도사(靈武節度使) 이진성이 태석산(太石山) 아래에서 토번의 3천 기()를 격파했다.

<구당서 토번전>

 

참고

청새보(靑塞堡): 영하 회족자치구 영무시(寧夏回族自治區 靈武市) 서남쪽

염주(鹽州): 섬서성 정변현(陝西省 榆林市 定边县,定邊)- 장안 북북서쪽 378km

토번과 당 사이에 맺어진 최후의 회맹인 장안회맹(장경회맹)

연평문(延平門): 장안성의 외곽성 서쪽 담장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성문

건중 말년의 회맹은 783년 거행된 청수회맹을 뜻한다.

평량(平涼): 감숙성 평량시(甘肅省 平涼市)- 장안 서북쪽 243km

영무(靈武): 영하 회족 자치구 은천시 관내 영무시- 장안 북북서쪽 407km

영무의 예전 이름은 영주(靈州)였다.

태석산(太石山): 신당서토번전과 자치통감에는 대석산(大石山)으로 되어 있다. 대석산(大石山)은 영하(寧夏) 서쪽 하곡(河曲) 지방에 해당된다.

 

 

 

장경 원년(821) 회골과 []의 화친 소식이 들리자, [토번이] 청새보(靑塞堡)를 침입하였으나 이문열에 쫓겨갔다. 곧 사신 상기력타사를 보내 내조하였는데 다시 회맹을 청하여 이를 허락했다. [당시] 최식, 두원영, 왕파가 정사를 맡고 있었는데, 이들은 태묘에 [회맹의 일을] 고할 것을 논의했다. 이에 예관(禮官)이 말하기를, “숙종과 대종(代宗) 모두 일찍이 토번과 회맹하였는데, 태묘에 고하지 않았습니다. 덕종의 건중 회맹은 그 약속한 내용이 중요한 것이어서 처음으로 태묘에 고했습니다. 평량 회맹 때는 또 다시 태묘에 고하지 않았으니 이는 당시 회맹에 의미를 두지 않은 것입니다.”하니, 이에 의논을 멈췄다. 대리경 유원정을 회맹사(盟會使), 우사랑중 유사로를 부관으로 삼았다. 또한 조서를 내려 재상과 상서우복사 한고, 어사중승 우승유, 이부상서 이강, 병부상서 소부, 호부상서 양어릉, 예부상서 위수, 태상경 조종유, 사농경 배무, 경조윤 유공작, 우금오장군 곽총 및 토번의 사신 논눌라로 하여 경사(장안)의 서쪽 교외에서 회맹하게 했다. 젠뽀(찬보)는 맹약에서 말하기를, “두 나라는 서로 침범하지 않으며, 포로의 문제가 발생하면 옷과 양식을 주어 돌려보낸다.”라고 하여, 조정에서 동의했다. 회맹에 참여한 대신들의 명단은 모두 문서에 기록했다. 바야흐로 회맹을 하려고 할 때, 토번의 정예 기병이 노주(魯州)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영주절도사(靈州節度使) 이진성이 대석산(大石山)에서 싸워 이를 격파했다. 오랑캐가 사신 조국장(趙國章)을 보내와 재상에게 서신과 폐물을 바쳤다.<신당서 토번전>

 

참고

청새보(靑塞堡): 영하 회족자치구 영무시(寧夏回族自治區 靈武市) 서남쪽

평량(平涼): 감숙성 평량시(甘肅省 平涼市)- 장안 서북쪽 243km

노주(魯州): 영하 서쪽, 하곡(河曲) 일대

영주(靈州): 감숙성 평량시 영대현(甘肅省 平凉灵台縣-靈台縣)

- 장안 북서쪽 146km. 옛 영주(靈州)영무(靈武)이다.

대석산(大石山): 노주(魯州)의 동남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