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30,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74, 5. 토번의 침공-26)

상 상 2016. 5. 18. 17:33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30,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74, 5. 토번의 침공-26)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1) 연표

 

1) 연표- 26

기 사

806

원화 원년(806) 정월에 복건도에서 토번의 백성 17명을 보내왔는데, 조서를 내려 이들에게 역마를 주어 토번에 돌려보내도록 했다. 6월에 [토번이] 사신 논발장을 보내 입조했다.

<구당서 토번전>

 

헌종(憲宗, 재위 806~820) 초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맺고 포로를 돌려보냈다. 또한 순종(順宗)의 죽음을 알리니 토번 역시 논발장을 보내왔다. 그 후로 매년 내조했다. 그러나 5만의 기병으로 진무(振武)의 불제천(拂鵜泉)을 침입하고, 만 기로 풍주(豐州)의 대석곡(大石穀)에 이르러, 회골(回鶻)이 귀국하는 것을 약탈했다.

<신당서 토번전>

 

참고

진무(振武):섬서성 유림시(陝西榆林市) - 장안 북북동 450km

불제천(拂鵜泉): 몽골 초원 카라코름 부근에 위치

풍주(豐州): 오르도스 일대로 황하의 남안에 해당

대석곡(大石穀): ?

808

원화 3(당 헌종, 808) 이모심이 죽자, 조를 내려 태상경 무소의(武少儀)로 하여금 절도(節度)를 받아 장례에 조문하도록 하였다. [이모심의] 아들 심합권(尋閤勸)이 즉위하였다. 혹은 몽주(夢湊)라고도 하며, 스스로 표신(驃信)’이라 자칭하였다. [표신은] 이족의 말로 군주와 같은 뜻이다. [당헌종은] 다시 원화인장(元和印章)을 하사하였는데, 이듬해 심합권이 죽었다. 그의 아들 권용성(勸龍晟)이 즉위하였는데, 음란 방자하고 무도하여 상하가 모두 원망하고 미워하였다.

<신당서 남조전>

809

원화 4(809) 애덕갈리록몰이시합밀비가가한(藹德曷里祿沒弭施合密毗迦可汗)이 사신을 보내 [국호를] 회골(迴鶻)로 바꾸겠다고 했는데, 그 의미는 돌고 가볍게 뛰어 오르는 것이 송골매와 같다는 것에서 취했다. <구당서 회홀전>

810

[원화] 5(810) 5월에 사신 논사야열이 입조하였고, 아울러 정숙구, 노필의 관()()숙구의 아들 ()문연 등 13명을 돌려보냈다. 정숙구와 노필은 평량의 회맹에서 포로가 되었으니, 대략 20여 년이 흘렀으나, 절개를 굽히지 않고 토번에서 죽었고, [이 때 토번이]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을 돌려보낸 것이다. 6월에 재상 두우 등에게 명하여 토번의 사신과 중서령의 관사에서 안건을 논의하게 했는데, 이 때 [토번에게] 우리 진(), (), 안락주의 땅을 돌려달라고 했다. 7월에 홍려소경 대리 어사중승 이섬을 입번사(入蕃使)로 삼았고, 단왕부장사 겸 시어사 오훈을 부사로 삼았다.

<구당서 토번전>

 

참고

평량(平涼): 감숙성 평량시(甘肅省 平涼市)- 장안 서북쪽 243km

진주(): 감숙성 천수시(甘肅省 天水市)- 장안 서서서북쪽 296km

원주()하 고원시 원주구(寧夏 固原市 原州區)-장안 북서쪽 304km

옛 원주: 감숙성 경양(慶陽)시 진원현(甘肅省 庆阳市 镇原县)-장안 북서쪽 215km

안락주(安樂州): 영하 중위시(寧夏 中卫市, 中衛)-장안 북서쪽 487km

 

[원화] 5(810), 사부랑중 서복이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아울러 발천포에게 서신을 보냈다. 발천포라는 자는 오랑캐의 승려로 국사를 담당하고 있었고, 또한 발체포(鉢掣逋)라고도 했다. 서복은 선주(鄯州)에 이르러 마음대로 돌아왔고, 그 부관 이봉이 찬보에게 조정의 명령을 전달했으니 이 일로 서복은 좌천되었다. 오랑캐가 논사사열을 사신으로 입조하여 사례하고 정숙구와 노필(路泌)의 유해를 돌려보내며, 진주(), 원주(), 안락주(安樂州)를 반환할 뜻이 있음을 언급했다. 조서를 내려 재상 두우 등에게 [논사사열과] 중서성에서 의논하도록 하여, 논사사열은 정()에서 배례(拜禮)하고, 두우는 당상에서 답례했다. 다시 홍려소경 이섬(李銛)과 단왕부장사(丹王府長史) 오훈(吳暈)을 토번에 파견하여 답방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매년 조공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농주(隴州) 변경에 이르러 호시를 청하니 조정에서 허락했다.<신당서 토번전>

 

참고

선주(鄯州): 청해성 해동시(青海省 海东市-海東市)- 장안 서서북쪽 632km

진주(秦州): 감숙성 천수시(甘肅省 天水市)- 장안 서서서북쪽 296km

원주(): 하 고원시 원주구(寧夏 固原市 原州區)-장안 북서쪽 304km

옛 원주: 감숙성 경양(慶陽)시 진원현(甘肅省 庆阳市 镇原县)-장안 북서쪽 215km

안락주(安樂州): 영하 중위시(寧夏 中卫市, 中衛)-장안 북서쪽 487km

농주(隴州): 섬서성 보계시 농현(陝西省 隴縣)- 장안 서서북쪽 197km

811

[원화] 6(811)에서 10(815)에 이르기까지 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구당서 토번전>

813

[원화] 8(813) 회골이 화친을 청했는데, 사자 이난주가 회골로 돌아갈 때 삼전(三殿)에서 연회를 베풀고 은으로 된 그릇과 비단을 내려주었다. 이 해에 회골 수천 기가 벽제천에 오자 변경의 군대가 대비를 했다.

 

122일 귀국하는 회골 마니(摩尼: 마니교도 또는 마니승을 지칭한다) 여덟 명에게 연회를 베풀고 그들에게 중서[]에 가서 재신(宰臣)을 만나게 했다.

이전에도 회골이 화친을 청하면 헌종(憲宗: 11)이 관리들에게 계산해보게 했는데, 예식 비용이 5백만 관이었고 마침 내적으로 토벌할 일이 있어 그 화친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회골이 마니[]를 신봉하고 있기 때문에 재신들이 그들과 화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조칙을 내려 종정소경 이효성을 회골 사신으로 보내면서 태상박사 은유를 부사로 삼아 그들이 와서 청한 뜻[을 이루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이상 구당서 회홀전>

 

참고

삼전(三殿)

벽제천: 내몽고 자치구 오납특후기 서북쪽에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