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최전방' 루마니아
출처: 조선일보, 입력 : 2016.05.16 03:00
국민에 의해 최후를 맞은 독재자는 많다. 하지만 루마니아 차우셰스쿠만큼 강한 인상을 남긴 경우는 드물다. 사형선고에서 집행까지 모습이 영상으로 공개됐기 때문이다. 함께 죽은 아내 엘레나가 자기를 끌고 가는 군인에게 "너희를 어머니처럼 키웠다"고 외치는 장면이 처량하다. '자식 같은 군인'의 총탄에 이윽고 엘레나는 머리에서 피를 뿜었고 차우셰스쿠는 무릎이 꺾인 채 뒤로 나자빠졌다.
▶루마니아는 발칸반도 북동쪽에 있다. 민족과 문명, 종교가 충돌하는 곳이다. 나라가 편안할 리 없다. 헝가리 제국, 오스만 튀르크 제국, 러시아의 침략에 내내 시달렸다. 소련에 영토 일부를 빼앗긴 적도 있다. 그런 만큼 내성(耐性)이 강하다. 15세기 블라드 3세는 잔인성 탓에 '흡혈귀 드라큘라'의 모델이 됐지만 국민의 존경을 받는다. 외세를 물리친 영웅이기 때문이다. 차우셰스쿠의 장기 집권은 이런 '반(反)외세' 정서 덕분에 가능했다. 소련이 만들어준 정권을 '반소련' 노선을 앞세워 25년 동안 유지했으니 보통 수완이 아니다.
▶그는 '어버이 수령' 소리를 들으면서 왕처럼 군림한 김일성을 특히 부러워한 모양이다. 김일성을 흉내 내 국민에게 '지도자' 소리를 강요했다. 사치와 과시까지 따라 했다. 사형 직전 엘레나의 '어머니' 발언에서도 북한 냄새가 나지 않는가. 하지만 기독교 국가인 데다 유교를 경험하지 못한 루마니아에서 북한식 우상화 전략이 통할 리 없었다. 처형 모습까지 공개된 걸 보면 루마니아 국민은 잠꼬대로 들은 듯하다.
▶차우셰스쿠에겐 김일성과 다른 점도 있었다. 한쪽에선 공산권 수령들을 만나면서 다른 쪽에선 닉슨과 카터, 일제 군국주의 책임자 히로히토까지 만났다. 자유무역의 관문인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에도 가입했다. 루마니아 국민이 그에게 받은 유산은 북한 주석궁을 흉내 낸 세계 둘째 규모의 인민 궁전만이 아니다. '친(親)서방' 외교 노선도 내치지 않고 물려받았다. 루마니아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해 서방 일원이 된 건 차우셰스쿠를 처형한 지 14년 후였다.
▶며칠 전 미국이 루마니아에서 유럽 미사일 방어(MD) 시스템을 가동했다. 러시아 코앞이다. 반발하는 러시아를 향해 미국은 "이란 미사일 방어용"이라며 둘러대고 있다. '한반도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를 둘러싼 한·미·중의 미묘한 갈등이 떠오른다. 공산국가 루마니아가 스스로 미국의 최전방이 될 줄은 몰랐다. 외세에 시달리며 그 나름대로 터득한 생존의 지혜일 것이다.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선우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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