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22,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66, 5. 토번의 침공-18)

상 상 2016. 4. 27. 18:01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22,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66, 5. 토번의 침공-18)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1) 연표

 

1) 연표- 18

기 사

787

10월에 토번의 수천 기()가 장무성(長武城)에 다시 이르자, 한전의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를 막았다. 한유괴의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도우려 했으나 한유괴가 허락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 적이 퇴각하자 한전의 역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이후로 적의 기병이 수시로 경(), () 사이를 왕래했으므로, 여러 성의 서문을 감히 열지 못했다. 적은 또한 옛 원주성(原州城)을 수리하고 많은 군사를 주둔시켰다.

<구당서 토번전>

 

참고

장무성(長武城): 섬서성 함양시 장무현(陝西省 長武縣)- 장안 서북쪽 141km

(): 감숙성 평량平凉 경천현(甘肅省 涇川縣)- 장안 북서쪽 181km

(): 섬서성 함양시 빈현(陝西省 彬縣)- 장안 북서쪽 96km

옛 원주성(原州城):감숙성 진원현(甘肅省 庆阳市 镇原县)-장안 북서쪽 215km

 

오랑캐(토번) 수천 기가 장무성(長武城: 섬서성 장무현)을 침범하여 성사(城使) 한전의가 이를 막았다. 한유괴의 병사는 출병하지 않았고, 이에 오랑캐는 안심하고 빈주와 경주 사이로 진군했으며 모든 주둔지의 서쪽 문을 걸어 잠궜고, 오랑캐는 옛 원주(原州) 성을 수리하여 그곳에 주둔했다. 황제는 사로잡은 2백 명이 안 되는 토번의 포로를 시장에서 참수하여 경사(장안)의 인심을 안정시켰다.

<신당서 토번전>

788

(정원) 4(788) 5월에 토번의 3만여 기병이 변경의 요새를 침범했는데, (), (), (), (), () 등 주()로 나누어 들어와서 팽원현(彭原縣)의 관청을 불태우고 이르는 곳마다 건물을 불질러서, 죽은 사람과 가축이 대략 2~3만에 이르렀는데, 대략 20일이 지나 비로소 퇴각했다. 진허행영장(陳許行營將) 한전의가 장무성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대항했는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갔다. ()유괴는 본래 군대의 일을 잘 모르는데다가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기만 할 뿐 감히 [토번의 침범을] 막지 못했다. 앞서 토번은 대개 가을과 겨울에 쳐들어 왔다가, 봄이 되어 질병이 많이 돌면 퇴각했다. 이번 침범은 바로 한여름이었으나 전염병이 없었다. [그 까닭은] 중국 사람으로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재물을 두터이 주고, 그들의 처자를 인질로 삼아, 토번 장수의 수하가 되게 하여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9월에 토번의 장수 상실동성, 논망라 등이 영주(寧州)에 쳐들어왔는데, 절도사 장헌보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를 막고 백여 급을 참수하니, 적이 군대를 돌려 인방(麟坊) 등 주()를 공격하여 크게 노략질한 뒤 돌아갔다.

<구당서 토번전>

 

참고

(): 감숙성 평량平凉 경천현(甘肅省 涇川縣)- 장안 북서쪽 181km

(): 섬서성 함양시 빈현(陝西省 彬縣)- 장안 북서쪽 96km

(): 감숙성 경양시 영현(甘肅省 庆阳市 寧縣)- 장안 북북서쪽 156km

(): 감숙성 경양시(甘肅省 庆阳市, 慶陽)- 장안 북북서 191km

인주(麟州): ?

팽원현(彭原縣): 감숙성 ? 섬서성 ?

인방(麟坊): 인주와 방주

 

 

[정원] 4(788) 5월에 오랑캐의 3만 기병이 경주(), 빈주(), 영주(寧州: 감숙성 영현-寧縣), 경주(慶州: 감숙성 경양현), 부주(鄜州: 섬서성 부현) 5주의 인근 지역을 약탈하니, 관공서와 민가를 불태우고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한전의는 진허(陳許)의 병사를 이끌고 장무(長武)에서 싸웠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처음에 토번이 변경을 침범할 때, 봄과 여름의 전염병을 두려워하여 항상 가을에 침입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토번군이] 당의 포로를 얻고, [중국 사람으로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후하게 재물을 나눠 주었으며, [그들의] 처자식을 인질로 하였으므로, 한여름에도 변경을 침입해 들어왔다. 상실동성, 논망라 등이 또 영주(寧州)를 침입하였는데 장헌보(張獻甫)가 이를 막아 백여 급을 베니, 방향을 바꿔 부주()와 방주()를 약탈하고 돌아갔다.<신당서 토번전>

 

참고

경주(): 감숙성 평량平凉 경천현(甘肅省 涇川縣)- 장안 북서쪽 181km

빈주(): 섬서성 함양시 빈현(陝西省 彬縣)- 장안 북서쪽 96km

영주(寧州): 감숙성 경양시 영현(甘肅省 庆阳市 寧縣)- 장안 북북서쪽 156km

경주(慶州): 감숙성 경양시(甘肅省 庆阳市, 慶陽)- 장안 북북서 191km

부주(鄜州): 섬서성 연안시 부현(陝西省 延安市 富縣)- 장안 북북동 187km

788

[정원] 4(788) 10월에 회흘 공주와 사신이 회흘에서 오자 덕종이 연희문에서 그들을 친히 만났다. 이 때 회흘 가한이 화친을 기뻐하면서 그에게 아주 공손한 예로 올려 말했다. “이전에 형제였고, 지금은 사위가 되었으니 반은 아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또한 토번의 사자에게 욕을 하면서 대수령 등의 부인 56명을 보내 가돈을 맞이하게 했는데, 보낸 사람이 천여 명에 이르고 바친 말이 2천 마리였다. 덕종이 삭주(朔州: 현 산서성 삭주시)와 태원에 나누어 7백 명씩 머무르게 했는데, 그 재상과 수령들이 모두 오자 나누어 홍려[]와 장작[]에 머무르게 했다.

계사일에 선정전에서 [회흘 일행을] 만났다. 을미일에 덕종이 회흘공주와 사신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불러 인덕전에 만나면서 각각 물자를 내려주었다.

경자일에 [황제가] 조칙을 내려 함안공주를 회흘 가한에게 시집보내는데, 바로 친왕의 예에 따라 부의 관속을 두게 했다. 전중감 사등왕 []담연을 함안공주 혼례사로 삼고 관파를 검교우복야 송함안공주급책회흘가한사(送咸安公主及冊迴紇可汗使)로 임명했다.<구당서 회홀전>

789

(정원) 5(789) 10월에 검남절도사 위고(韋皋)가 휘하의 장수 왕유도(王有道) 등을 보내, 동만(東蠻), 양림, 저나시와 물등(勿鄧), 몽충(夢衝) 등의 군사와 함께 옛 휴주(巂州: 사천과 운남성의 경계)의 대등, 북곡에서 토번의 청해(靑海), 엽성 두 절도(節度)를 대파하고, 토번의 대병마사 걸장차차, 실다양주를 죽이고 2천여 급을 참수했으며, 절벽 계곡에 던지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다 셀 수가 없었다. [또한] 농관(籠官) 45명을 사로잡고, 병기 등 장비 만여 건과 말, , 양 등 가축 만여 두를 획득했다. 차차(遮遮)라는 자는 토번의 용맹한 군장으로서, 혹자는 상결찬의 아들이라 하는데, 번번이 변경의 근심이 되었다. 그가 죽고 난 뒤 관군이 공격하는 성책 중 항복하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토번의 군대가 날로 퇴각하여 수년 사이에 휴주의 땅을 거의 회복했다.

<구당서 토번전>

 

참고

휴주(巂州): 사천성과 운남성의 교계-경계? 지역

    嶲州(수주)?-사천성 서창시(四川省 西昌市)- 장안 남서쪽 953km

 

[정원] 5(789), 위고(韋皋)가 검남의 병사를 이끌고 대등(臺登)에서 싸워 오랑캐의 장수 걸장차차와 실다양주를 죽이니, 서남 지역이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 3년이 되지 않아 휴주(巂州) 일대를 얻었다. <신당서 토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