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0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49, 5. 토번의 침공-1)

상 상 2016. 3. 15. 19:04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0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49, 5. 토번의 침공-1)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1) 연표

 

1) 연표- 1

: 763130일 이후 ~ 황소의 난(875884)

 

이 연표는 이제까지 올린 신구당서 토번전을 중심으로, 회홀전, 남조전, 구당서 당 덕종 본기 등의 관련 사료를 연도순으로 작성한 것임.

 

사 건

763

보응 2(763) 3월에 좌산기상시 겸 어사대부 이지방, 좌서자 겸 어사중승 최륜을 사신으로 토번에 보냈는데 이들은 국경에 도착한 뒤 억류되었다.

<구당서 토번전>

 

이듬해(763) (토번이) 대진관(大震關)으로 침입하여 난주(蘭州), 하주(河州), 선주(鄯州), 조주(洮州) 등의 주()를 취하니 이때 농우(隴右) 일대를 모두 토번에 잃었다.

<신당서 토번전>

 

참고

대진관(大震關): 감숙성 천수시 청수현(甘肅省 淸水縣)- 장안 서서북쪽 260km

난주(蘭州): 감숙성 란주시(甘肅省 蘭州市)- 장안 북서쪽 504km

하주(河州): 감숙성 임하시(甘肅省 临夏市-臨夏)- 장안 서서북쪽 543km

선주(鄯州): 청해성 해동시(青海省 海东市-海東市)- 장안 서서북쪽 632km

조주(洮州):감숙성 임조현(甘肅省 定西市 临洮县-臨洮)- 장안 서서북쪽 478km

농우(隴右): 지금 감숙성 서쪽, 황하 동쪽 지역

 

광덕 원년(763) 9월에 토번이 경주(涇州)를 공격하여 함락했다.

10월에는 빈주(邠州)를 침략하고 또한 봉천현(奉天縣)을 함락했다.

 

중서령 곽자의를 보내 서쪽을 방어하게 했다. 토번이 토욕혼과 당항강의 무리 20여 만으로 용광도로부터 동쪽으로 왔다. 곽자의는 군대를 후퇴했고 황제의 어가는 섬주(陝州)로 행차하여, 서울(장안)은 지킴을 잃었다. 항복한 장수 고휘가 토번을 이끌고 상도성(上都城,:장안)으로 들어와 토번의 대장 마중영 등과 함께 죽은 빈왕의 아들 광무왕 ()승굉을 황제로 옹립했는데, 연호를 세우고 크게 사면하였으며, 관원을 두고, 이어서 사봉(司封) 최괴 등을 재상으로 삼았다. 곽자의가 철군하여 남쪽으로 가서 상주(商州)를 지켰는데, 토번이 성에 머물다 15일 만에 후퇴하자, 관군(당나라군)이 상도(上都:장안)를 수복하고 곽자의를 유수(留守)로 삼았다.

<구당서 토번전>

 

참고

경주(涇州): 감숙성 평량平凉 경천현(甘肅省 涇川縣)- 장안 북서쪽 181km

빈주(邠州): 섬서성 함양시 빈현(陝西省 彬縣)- 장안 북서쪽 96km

봉천현(奉天縣): 섬서성 함양시 건현(陝西省 乾縣)- 장안 북서쪽 65km

섬주(陝州): 하남성 삼문협시 섬현(河南省 陝縣)- 장안 동동북쪽 203km

빈왕: 금성공주의 아버지 옹왕 이수례

상주(商州): 섬서성 상락시 상주구(陝西省 商洛市商州區)- 장안 남동쪽 105km

 

다시 진군하여 경주(涇州)를 포위했다가 입성하여 자사 고휘를 항복시켰다.

또 빈주(邠州)를 격파하고 봉천(奉天)으로 들어왔는데 부원수 곽자의가 이를 막았다. 토번이 토욕혼, 당항의 병사 20만과 함께 동쪽으로 무공(武功)을 경략했다. 이에 위북행영장 여일장이 주질(盩厔)의 서쪽에서 싸워 이를 격파했다. 또 종남(終南)에서 싸웠는데 여일장이 도주하였다. () 대종(代宗)이 섬주(陝州)로 피신하고 곽자의는 상주(商州)로 퇴각하였다. 고휘가 오랑캐(토번)를 인도하여 장안으로 들어와 광무왕(廣武王) ()승굉을 황제로 옹립하고 연호를 고쳤으며 멋대로 사면을 단행하고 관리를 임명했다. <신당서 토번전>

 

참고

 

경주(涇州): 감숙성 평량平凉경천현(甘肅省 涇川縣)- 장안 북서쪽 181km

빈주(邠州): 섬서성 함양시 빈현(陝西省 彬縣)- 장안 북서쪽 96km

봉천(奉天): 섬서성 함양시 건현 서쪽(陝西省 乾縣)- 장안 북서쪽 65km

무공(武功): 섬서성 함양시 무공현(陝西省 武功縣)- 장안 서서남쪽 68km

주질(盩厔): 섬서성 서안시 주지현(陝西省 周至)- 장안 남서쪽 68km

종남(終南): 섬서성 서안시 주지현 종남진(陝西省 終南)- 장안 남서쪽 54km

섬주(陝州): 하남성 삼문협시 섬현(河南省 陝縣)- 장안 동동북쪽 203km

상주(商州): 섬서성 상락시 상주구(陝西省 商州區)- 장안 남동쪽 105km

 

당초 황제는 동쪽으로 행차했으나, 관료와 인척 등은 모두 남쪽 형양(荊襄: 형주와 양주)으로 가거나 산골짜기에 쥐처럼 숨었는데, 이때 6(六軍)의 장사(將士)들이 무기를 들고 겁탈하니 소식이 끊어졌다. 곽자의는 부곡(部曲) 수백 명과 그의

처자, 종복을 이끌고 남쪽으로 가서 우심곡에 들어갔는데, 낙타, , 소가 끄는 수레가 수백 량이었으나 곽자의가 지체하니, 어디로 가야할지 갈 바를 알지 못했다. 행군판관 중서사인 왕연창, 감찰어사 이악이 곽자의에게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원수(元帥)가 되었으며, 주상이 밖에서 몽진하니, 우리나라의 일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토번의 기세에 날로 핍박되니 골짜기에 숨는다 한들 어찌 안도하겠으며, 어찌 남쪽 상주(商州)로 가서 황제의 행차에 가까이 다다르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곽자의가 바로 이를 따랐다. ()연창이 말하기를, “토번은 영공(令公)이 남쪽으로 간 것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병사를 나누어 와서 핍박할 것입니다. 만약 큰 길로 간다면 일이 곧바로 위태로워질 것이니, 옥산로(玉山路)를 취하여 가서, 토번이 예상하지 못한 방법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곽자의가 다시 이를 따랐다. ()연창과 이악이 모두 곽자의를 따랐는데, 곽자의의 부대 천여 명은 산길이 매우 좁았기 때문에 [그 행렬이] 백여 리나 늘어졌으며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릴 수 없었다. ()연창과 ()악은 좁은 길에서 추격당하면 전후에서 서로 구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도회구(倒迴口)에 이르자 곽자의와 따로 행군하였으니, 험준한 계곡물을 건너고 칠반(七盤)을 올라 급히 상주로 갔다. 이에 앞서 6군장(六軍將) 장지절과 부하 수백 명은 경성(京城:장안)에서 상주(商州)로 급히 가서 피난 온 조정 관료와 수행인의 재물과 말을 크게 약탈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연창과 ()악이 도착한 뒤 ()지절에게 말하기를, “장군은 황제의 금병(禁兵)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군대가 패한 뒤 황제의 행재(行在)에 가지 않고 그 부하들이 약탈하는 것을 방치하였으니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지금 곽령공(郭令公:곽자의)이 원수인데 이미 낙()수의 남쪽으로 올 준비가 되었으니, 장군이 만약 사졸을 정돈하여 무엇이 화복(禍福)이고 이해(利害)인지 분명히 알리고, 영공(令公)에게 와서 위무해줄 것을 청하여, 장안을 수복할 것을 함께 도모한다면, 이는 장군의 특별한 공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지절이 크게 기뻐했다. 당시 여러 군장(軍將) 장희양, 고승, 팽체영, 이유선 등이 각기 부곡(部曲)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수십 기()를 이끌고 서로 이어 도착하여, [()연창과 이악의] 계책을 따르니, 모두 군영에 편입되고, 다시는 침범하고 약탈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연창이 군영에 남아 규약을 주관하고, ()악이 여러 기병과 함께 가서 ()자의를 마중했는데, ()수의 남쪽 십여 리에서 만나 ()자의와 함께 상주(商州)로 돌아오니 여러 장수들이 크게 기뻐하고 모두 그 약속을 따르기로 했다.

<구당서 토번전>

 

참고

상주(商州): 섬서성 상락시 상주구(陝西省 商州區)- 장안 남동쪽 105km

 

의관(衣冠)을 갖춘 상류 사인들은 모두 남쪽 형주(荊州), 양주(襄州)로 도주하였고 혹자는 산골로 숨어들었으니 [안록산의] 반란군이 이를 틈타 약탈하였으며 도로는 두절되었다.

<신당서 토번전>

 

참고

형주(荊州): 호북성 강릉현(湖北省 江陵縣)- 장안 남남동쪽 576km

양주(襄州): 호북성 양양현(湖北省 襄陽縣)- 장안 남동쪽 392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