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중앙일보]입력 2016.03.14 00:18 수정 2016.03.14 00:51 | 종합 35면 지면보기
.우리 민족이 다시 한번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1월 6일의 북한 4차 핵실험과 2월 7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촉발된 한반도의 위기 상황은 한국의 개성공단 중단 및 유엔 안보리의 북한 제재 결정으로 신속하게 이어졌다. 결국 “한반도에는 화약 냄새가 가득하다”는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의 말대로 우리는 위기 국면을 맞고 있다.
이번 한반도 위기는 더 이상 ‘결단의 시간’을 늦추지 못하겠다는 북한 스스로의 사정으로 촉발된 것이지만 어차피 북한 핵 문제를 계속 방치할 수 없는 한국이나 관련 강대국의 입장에선 오히려 적시에 벌어진 사태라고도 할 수 있다. 냉전이 끝난 후부터 국제사회와 세계사의 흐름으로부터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북한의 예외성은 핵무장을 추진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위험도를 높여왔다. 세계화의 물결에 동참한 중국·러시아·베트남 등 공산당 통치 대열에서 이탈하여 홀로 ‘우리 식’을 주장한 북한은 21세기에 들어서서도 전쟁보다는 평화를 무서워하는 예외적인 체제와 전략을 고집하며 긴장을 고조시켜왔다. 이번 유엔의 대북제재를 계기로 미국·중국·러시아 및 유럽연합, 아세안 등 국제사회는 한반도 문제 처리를 위해 새 틀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말로부터 독립운동기를 거치며 우리 민족의 선구자와 선각자들이 깨우쳐준 교훈은 나라의 독립과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선 자주와 평화를 함께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큰 나라들에 둘러싸인 우리의 지정학적 여건은 강대국과의, 그리고 강대국 간의 평화와 균형 유지가 우리 민족의 안전과 독립의 필수조건임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인식하고 국가 운영에 임하는 것이 곧 자주의 원칙과 평화 전략에 충실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교훈을 무시하고 과대망상에 휩싸여 소아적 영웅주의에 끌려간다면 국가 체제와 민족의 안전을 한꺼번에 위기로 빠뜨리게 될 것이다. .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국제 체제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이 되어 미국을 비롯한 유엔의 상임이사국(P5)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가겠다는, 그리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선 미국과 중국의 이른바 G2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G3 시대를 지향하겠다는 북한의 목표는 대담하기보다는 무모함에 가깝다고 하겠다. 우선 미국이나 중국과도 대등한 반열에 서겠다는 북한 입장의 근거인 ‘핵무장 국가 간의 공포의 균형’ 논리 자체가 한반도 상황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공통된 인식이다. 북한 핵의 직접적 위협을 받는 대상의 첫째가 한국이고 그 다음이 일본인데 공포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촉발하여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누구보다도 중국이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원천적이며 확고한 반대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북핵에 대비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의 한국 배치 가능성이 촉발한 중국의 예민한 반응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분단된 한반도 대결 구도의 당사자인 남북 관계의 현실을 뛰어넘어 핵무장한 강대국화로 단숨에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엉뚱한 전략을 고집하는 북한은 유엔 제재가 집행 단계로 접어드는 작금의 상황에서도 핵탄두의 경량화니, 규격화니 하며 서울은 물론 워싱턴·뉴욕도 사정권 안에 들어 있다는 등 도발적 언동을 이어가고 있다. 북한이 이렇듯 무모한 모험을 계속하는 것은 결국 경제제재를 넘어선 군사제재를 유발할 가능성을 높여갈 것이 상황의 논리이기에 한반도가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경종을 가볍게 흘려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북한은 체제의 존망을 걸면서 5차 핵실험을 기획하기보다는 평화통일로 향한 남북 공존의 궤도로 복귀하며 국제사회와의 정상적 관계를 모색하는 쪽으로 과감한 방향 전환을 시도해야 될 것이다.
지금처럼 긴장된 국면에서도 한반도 평화, 나아가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북한의 용기 있는 결단에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핵무기 시대의 전쟁이 곧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의 대다수 한국 국민은 전쟁을 통한 통일보다는 평화로운 분단을 감내할 용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7·4 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 공동선언의 실효는 없어졌더라도 꿈과 명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같은 맥락에서 동양평화에 기여하는 일본의 평화헌법이 존속되기를 한국인들은 기대하고 있다. 평화와 통일로 향한 꿈과 희망의 줄을 놓아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기도처럼 첨가했던 “북 핵실험이 평화로 향한 전화위복의 전기가 될 수 있을지”라는 지난 1월 30일자 칼럼의 마지막 줄은 우리 민족의 평화에 대한 염원, 그리고 합리적 판단을 뒷받침하는 지혜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출처: 중앙일보] [이홍구 칼럼]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