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79,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3), 돌궐족 묵철의 침공-17)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79,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3), 돌궐족 묵철의 침공-17)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1) 연표 2) 연표 분석 및 해설 3) 요약
2) 연표 분석 및 해설: ⇒ 이진충의 난이 미친 파장 (1) 연도별 분석 및 해설(698년 ~ 755년) (2) 나라별 분석 및 해설
(1) 연도별 분석 및 해설-7
다른 햔편 서쪽 토번에서는
727년 정월에 왕군착이 병사를 이끌고 청해(靑海)의 서쪽에서 토번을 격파하고, 토번의 군수품과 양, 말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그러자 그해 9월에 토번의 대장 실낙라공록과 촉룡망포지가 과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자사 전원헌과 왕군착의 아버지 왕수를 잡고 성 안의 군수품 및 식량을 모두 취한 뒤 성을 불태우고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군착은 회흘(回紇)의 잔당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병부상서 소숭을 하서절도사에 임명하고, 장수규를 과주자사로 삼아, 주(州)의 성곽을 축조하고 백성을 불러 모아 본업에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당시 실낙라공록의 위엄있는 명성이 드높았는데, 소숭이 토번 내부를 이간시킬 계책을 써서, 그가 중국과 몰래 통한다고 소문을 내자 찬보가 실낙라공록을 소환하여 죽였다.
다시 북쪽의 돌궐에서는, 소살(비가가한, 묵극련)이 그 대신(大臣) 매록철을 당나라로 보내 좋은 말 30필을 바쳤다. 이때 당 현종이 매록철을 불러 자신전에서 잔치를 열어주고 후히 상과 하사품을 더해 주었고, 바로 삭방군의 서수항성을 호시(互市) 장소로 삼도록 하며 매년 비단 수십만 필을 갖고 변경에 가서 그들에게 주라고 한다.
즉 이때, 당 현종은 매록철을 이간질에 써먹으려고 매수한 것이다. 다시 서쪽 토번에서는
728년 가을에 토번 대장 실말랑이 다시 무리를 이끌고 과주를 공격하니, 장수규가 출병하여 격퇴했다. 8월에 소숭이 다시 부장 두빈객을 보내 노수(弩手) 사천 명을 인솔하고 기련성 아래에서 토번과 교전하여 토번을 물리쳤다
729년 삭방대총관 신안왕 이의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농우(隴右)에 가서 석보성을 함락시키고, 석보성에 진무군(振武軍)을 두고, 포로들을 태묘에 바쳤다.
이때 토번에서 자주 사신을 보내 화평을 청했는데, 충왕(忠王:훗날 숙종)의 친구 황보유명이 현종을 직접 배알하고 강화를 주장하여 당 현종이 황보유명 및 내시 장원방을 사신으로 임명하여, 토번에 가서 문안하게 했다. 이에 토번의 찬보가 흔쾌히 강화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금성공주와 혼인하여 한 집안을 이루었으니, 천하 백성이 모두 안락하게 되었는데 중간에 장현표(張玄表), 이지고(李知古) 등이 동서 두 방향에서 먼저 군사를 움직여 토번을 침공하였으므로 변경의 장수들이 서로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틈이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당이 먼저 토번을 침략하여 710년 이후의 일이 생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찬보는 변경의 장수들을 처분하고, 침략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만약 한인(漢人)이 와서 투항하면 바로 송환했다고 말하며 화친을 수락하였다. 이에따라
730년 10월에 토번의 사신 명실렵 등이 장안에 이르러 적령(赤嶺)에 각자 경계를 표시한 비석을 세워 다시는 서로 침공하지 않기를 서약했다. 이렇게 해서 토번과 당나라가 다시한번 평화조약을 맺는다.
한편 거란쪽에서는
가돌우가 이소고를 죽이고 해(奚)의 무리를 위협해 돌궐에 항복하자 동화공주는 도망쳐 평로군(平盧軍)에 의탁했다.
이에 배관과 설간 등에게 장안 및 관내· 하동· 하남· 하북도에서 씩씩하고 용맹한 병사를 모으게 하고 충왕 이준을 하북도행군원수로 삼아 그들을 토벌하게 했으나 군대는 끝내 가지 않았다. 거란에 대하여 군사적 공격을 못한 것이다. 그리고 더 먼 동쪽의 발해에서 일이 일어났는데
732년 발해의 대무예(제2대 무왕)가 그의 장수 장문휴를 보내어 해군으로 등주자사 위준을 공격하였다. 이에 당 현종은 당에 와있던 대문예(대무예의 동생)를 파견하여 유주에 가서 군사를 징발하여 이를 토벌케 하는 동시에 당에 와 있던 신라왕족 김사란을 시켜 신라에 가서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남쪽 지경(南境)을 치게 하였다.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 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으니, 전공을 거두지 못한 채 돌아왔다. 대무예(제2대 무왕)가 원한을 풀지 못하여 몰래 동도(낙양)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자객을 빌어 천진교 남쪽에서 대문예를 저격케 하였으나, 대문예는 자객들을 물리쳐서 죽지 않았다.(삼국사기에는 이 일이 733년으로 되어 있음)
당이 흑수말갈과 손잡고 발해를 앞뒤에서 치려고 했다가 발각되자 대문예가 당으로 달아났는데 대무예(발해 무왕)이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이라고 하자 당 현종이 대문에를 영남으로 빼돌리니 대무예(발해 무왕)이 당을 공격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또한번 알 수 있듯이 발해는 당의 종속국가가 아니다. 자기를 멸망시키려는 당나라를 공격하는 발해가 어떻게 당의 종속국인가? 그리고 당은 발해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멸망시키려는 공작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즉, 대문예와 김사란을 시켜 발해의 앞뒤에서 실제로 공격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발해보다 더 먼 신라가 당의 하수인이 아님을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 당시 거란과는 혼인동맹을 맺고 있고, 그 보다 더 먼 동쪽의 발해에게는 군사적 영향력이 없어 흑수말갈을 동원하여 발해를 치려다가 발각되어 발해로부터 보복을 당하는 형편에 발해보다 더욱 더 먼 동쪽에 있는 신라에 무슨 당의 영향력이 있었겠는가?
또한 이때 신라에게 군대를 강제로 동원하게 한 것도 아니다. 태복원외경 김사란으로 하여금 신라에 가서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남쪽 경계를 공격하도록 명한 것.(仍令太僕員外卿金思蘭往新羅發兵以攻其南境) 뿐이다. 김사란을 보낸 것 뿐이고, 김사란에게 신라에 가서 군사를 일으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에서 군사를 일으킬 권한은 국왕에게 있지 신라 왕족의 한 사람에 불과한 김사란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신라 왕족이 한두 사람이 아닐뿐더러 신라 왕족끼리도 성골과 진골이 있으며 왕권을 두고 서로 싸울수 있는 판에 신라 왕족의 어느 한사람에 불고한 김사란에게 신라에 가서 군사를 일으키라고 해서 신라 국왕이 정말 군사를 일으키겠는가?
또한,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 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는 북쪽 유주(幽州: 현 북경지방)에서 발해를 공격한 대문예 쪽에서 발생한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발해 건국후 처음이자 마지막 발해와 당나라의 군사적 충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