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7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7), 돌궐족 묵철의 침공-11)

상 상 2015. 12. 21. 17:40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7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7), 돌궐족 묵철의 침공-11)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1) 연표

2) 연표 분석 및 해설

3) 요약

 

 

2) 연표 분석 및 해설:

이진충의 난이 미친 파장

(1) 연도별 분석 및 해설(698~ 755)

(2) 나라별 분석 및 해설

 

 

이진충의 난은 2년 만에 끝났지만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 이진충의 난 도중에 발해가 건국한 것이다.

둘째, 돌궐이 다시 강대해 진 것이다.

셋째, 이진충의 난으로 또다시 커다란 당나라의 군사력 소진이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됨에 따라 이전부터 계속되었던 북쪽(돌궐)과 서쪽(토번) 2개의 전쟁은 지속되었는데,

다만 그전과 달라진 점은 강대해진 돌궐에게 더욱 심하게 시달리게 된다는 점이다.

이에따라 당나라는 또다시 군사력 소진이 진행되어 군사력 고갈상태에 들어간다.

 

그리고 동쪽에 대한 당나라의 행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가 두 번씩이나 당나라에 대승을 거두자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기고 고구려 보장왕을 조선왕으로 봉하여 고구려를 간접 통치하려 한다.(기미정책)

그러나 이마저 실패로 돌아가고 게다가 이진충의 난으로 발해가 건국하자 이 지역에서 완전히 밀려나 다시는 여기서 발을 못 붙이게 된다. 이에따라 신라와 발해에 대해서 다시는 군사적 침략행위를 못하게 되고 따라서 신라와 발해에 대한 정치 군사적 영향력이 없어졌으며 친선외교 활동만 시행하게 된다.

 

이러한 영향은 이진충의 난이 끝난 뒤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모습을 연도별로 살펴보자

 

 

 

(1) 연도별 분석 및 해설- 1

 

698

5묵철이 거란을 진압한 대가로 항호와 선우도호부의 땅을 달라고 하며 아울러 농기구와 종자도 달라고

하니무측천이 처음에는 불허하였다.

이에 묵철이 크게 화를 내어언사를 심히 거만하게 하며당나라 사신 전귀도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렇게

되니 당나라 조정은 그 군사의 위세를 두려워하여그 화친을 허락할 것을 청하고이에따라 묵철은 마침내

6주의 항호 수천 장(: 세대, 가구)을 다 몰고 갔다. 아울러 종자 4만여석과 농기구 3천사를 함께 주니

묵철이 이 때문에 점차로 강성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항호란 함형 연간(670~673)돌궐 여러 부락의 투항해 귀부한 자들이대부분 풍주승주영주하주삭주대주 등 6주 여러 곳에 살았는데이들을 항호(降戶)라고 불렀던 것이었다.

 

그와 함께 이때(5) 돌궐의 묵철이 딸이 있다고 말하며 당나라에 화친을 청하였다.

이렇게 되자,

 

7회양왕 무연수(무측천의 조카 위왕 무승사의 아들)에게 명하여 돌궐에 가서묵철의 딸을 받아들여 왕비로 삼게 하였다. 염지미에게 춘관상서를 겸임하게 하고 보내돌궐의 궁정에 금과 비단을 송부하였다.

그러나,

 

8돌궐의 묵철이 무연수가 당 황실의 제왕(諸王: 이씨)이 아니라는 이유로별도의 장소에 가두며무리 10여만을 통솔하여두 이씨를(이현과 이담)를 옹립하겠다고 당나라의 정난군과 평적군청이군을 습격하고. 잠시 후 규주단주를 침략한다. 이에무측천이 무중규사타충의장인단을 앞세워병사 30만을 통솔하여 치도록 명하였다. 또한 염경용으로 하여금병사 15만을 거느리고 후원하도록 하였다. 무려 45만 대군을 동원한 것이다.

 

그러나 묵철이 또 긍악도로부터 나와울주를 침구하고비호현을 함락하고, 잠시후 정주(定州)로 진격하여자사 손언고를 죽이며백성들의 오두막과 집을 불 태우고남녀를 노략질하여 사로잡아나이가 어리고 많고 없이 모두 죽였다.

 

이렇게 묵철이 혼인의 상대방이 이씨(당 황실)가 아니라는 이유로 호되게 공격을 하자, 무측천은 이씨를 황태자로 삼는다. , 당나라 황제(중종)였다가 폐위한 이현을 다시 황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무측천이 나라를 빼앗기게 되는 중대한 실수인 동시에 당이 나라를 되찾는 기사회생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 이현을 황태자로 삼았기 때문에 엣 당나라 신하들이 이현을 황제로 옹립하기로 하고 반란을 일으켜 주나라 여황제 무측천을 쫓아내며 다시 당나라가 살아나게 된 것이고 이현이 당 중종으로 복귀한 것이다. 다시말해서 멸망한 당이 나라를 되찾게 된 것은 돌궐의 묵철 때문이었다.

 

9월 무측천은 황태자 여릉왕 이현(당 중종)을 또다시 하북도 행군대원수를 맏도록 하여 공격을 명령하였으나군대가 아직 출발하기도 전에 묵철이 조주정주 등에 있는 남녀 8~9만명을 모두 강탈하고 오회도를 따라 가면서통과하는 곳마다 잔인하게 학살하니그 숫자를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 사타충의와 이다조 등은 모두 중요한 병사를 가졌으나적과 서로 바라볼 뿐감히 싸우려 하지 않았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어떻게 당나라 45만 대군이 돌궐이 무서워 바라보기만 할뿐 감히 싸울 생각도 못했다는 말인가? 돌궐의 엄청난 군사력과 허접한 쓰레기 당나라의 군사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적인걸만이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추격하였으나미치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무서워서 꼼짝을 못하였는데 어떻게 쫓아 갈 수가 있었겠는가?

 

이러자 무측천이 대노하여묵철을 목베는 자는 왕에 봉한다는 상을 내걸고

묵철의 이름을 참철(斬啜: 목 잘린 묵철)로 고친다.

 

여기서 또다시 이민족에게 당한 분풀이를 글자에다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옛날 중국인들은 이민족에게 당하면 할줄 아는 게 글자에다 분풀이를 하는 것이고

할수 있는 게 글자로 분풀이 하는 것 뿐이었다.

자기네만 글자를 가지고 있으니 그 글자로나마 실컷 분풀이를 하는 것이고

그런 식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국 역사 기록은 거짓이 많이 섞여 있는 것이다.

또한, 무측천이 당 태종의 후궁이었으니 이러한 버릇은 직접적으로 당 태종에게 배운 것임에 틀림없다.

(당 태종 때에 이미 돌궐에게 당하고 글자에다 분풀이를 한 사례가 있었음)

 

한편 대조영이 성력 연간(698~699)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에 올라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돌궐과 전통적으로 우호관계 및 동맹관계를 맺어온 것을 진국(振國: 발해)가 계승한 것이다.

 

699

이 무렵 돌궐은 대체적으로 병력이 힐리가한 시기와 거의 비슷했으며 땅이 가로 세로로 만 리나 되었다.

다시 돌궐이 강대해 진 것이다.

그래서

 

700

돌궐이 농우에 있는 제감의 말 만여필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이에 위원충을 영무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대비하고또 상왕 이단(당 예종)을 천병도원수로 삼아토벌하라고 명하였으나마침내 실행하기도 전에 돌궐이 물러났다.

 

북쪽 전선에서의 전쟁은 이렇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서쪽 전선에서는

 

토번이 다시 장수 국망포지를 보내 양주(涼州)를 노략질하고, 창송현을 포위 공격하였다.

당나라의 당휴경과 토번의 국망포지가 홍원곡에서 싸웠는데, 토번의 부장(副將) 둘을 베고, 25백 급을

노획한다.

 

당나라가 끔찍한 2개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702

1월 다시 북쪽에 있는 돌궐이 염주와 하주를 침략하여백상과 관리들을 매질하고 죽였다.

그리고

 

703

묵철이 사신 막하달간을 보내 딸을 황태자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청하자

무측천은 황태자(당 중종 이현)의 아들 평은왕 이중준과 의흥왕 이중명을 조정에 들어와 알현하게 한다.

 

저번 6988월 무씨를 신랑으로 내세웠다가 크게 혼나자 이번에는 이씨를 내 보인 것이다.

그런데도 묵철은 또 무엇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705

중종이 즉위하자묵철이 또 영주 명사현에 침구하여영무군대총관 사타충의가 막아 오래동안 싸웠으나관군이 패하여죽은 자가 6천여명이었고적이 마침내 원()() 등의 주()까지 진격하여 침구해서농우의 여러 목장의 말 만여필을 약탈하고 돌아가므로(사타)충의는 (이일에) 연좌되어 면직 되었다.

 

 

이에 당 중종이 묵철의 청혼을 거절하며또다시 묵철의 목을 베거나 사로잡을 수 있는 자는 국왕으로 봉하며대장군의 지위와 재물 2천단을 현상금으로 걸었다.

 

국왕과 대장군, 막대한 재물이라는 아주 최고의 현상금을 걸고 있다.

너무 시달리다보니 이런 현상금도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