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는 군사적 신뢰부터 구축해야
[중앙일보]입력 2015.11.27 00:48 수정 2015.11.27 01:54 | 종합 33면 지면보기
8·25 합의 이후에도 남북 간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비무장지대(DMZ) 일대의 군사도발 위협이 잦아들고 확성기 소리가 멈췄지만 바로 평화가 찾아오진 않았다. 10월 하순 두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에도 불구하고 상봉 정례화는 아직 요원하다. 함께 합의했던 당국회담도 이제 겨우 실무회담을 했을 뿐이다.
6·25전쟁 이후 남북관계는 늘 롤러코스터를 탔다. 하지만 탈냉전 이후 지금처럼 살얼음판을 딛는 불안감으로 다가온 건 얼마 되지 않았다. 2000년을 전후해 연평해전이 두 차례 있었고 그 뒤 서해상에서의 초보적 신뢰구축 조치 합의로 한동안 긴장이 잦아들었다가 2008년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군사도발과 충돌이 다시 발생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 지난해 대북전단 고사총 사격과 올 8월의 지뢰도발까지 사건이 이어졌다. 특히 북한이 2012년 12월의 인공위성 발사와 2013년 2월의 3차 핵실험 이후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대한 일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재래식 전력에 의한 도발을 늘렸다는 판단도 있어 고도의 주의를 요한다. . 남북 간 긴장완화와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군사회담의 필요성은 바로 이 점에 기인한다. 군사 당국이 마주 앉아 군사 현안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긴장완화의 상징적 조치다. 이미 남북 간에는 두 차례의 국방장관회담과 7번의 장성급 군사회담, 39회의 군사실무회담이 열려 긴장완화와 군사적 신뢰구축, 그리고 교류협력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논의된 바 있다. 특히 2007년 11월의 2차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는 적대행위 중지와 서해상 충돌방지, 그리고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에 규정됐으나 이행되지 않고 있는 남북군사공동위원회의 구성·운영에 관한 재합의까지 있었다.
남북 군사회담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실질적 이행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앞으로 평화협정과 부속문서들이 체결될 경우 현재의 군사분계선(MDL)을 재확인하는 조치와 함께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체해 한반도에서의 군사관리를 담당할 기구가 필요하다. 또 평화체제 수립 시 전쟁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일정한 군비통제 조치도 필요하다. 아마도 앞에서 언급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 등 각급 군사회담이 상설화할 경우 이 같은 부분은 바로 남북 간에 다뤄질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2005년 9·19 공동성명 논의 과정에서 한국이 한반도의 ‘군사적 실체’라며 평화체제의 직접 관계국임을 인정한 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2차 국방장관회담의 공동 보도문에는 “쌍방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나가기 위해 군사적으로 상호 협력하기로 하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사실 앞으로 당국회담이 열리더라도 주요 현안에 대한 남북의 현격한 입장 차이로 인해 합의가 쉽게 이뤄지기 힘들다. 남북 간 포괄적 의제를 다루게 될 당국회담에서는 이미 합의된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및 민간교류 확대에 관한 후속조치들과 함께 금강산관광 및 개성관광 재개, 경의선 철도 운행, 천안함 사과와 5·24 조치 해제 등이 거론될 수 있다. 또 최근 북한이 문제 삼고 있는 한·미 연합 군사연습과 대북전단 문제도 거론될 것이다. 오랜 이슈인 6·15 및 10·4선언, 그리고 최대 안보 현안인 북한 핵 문제와 인권 문제 등도 언급될 가능성이 있다. 어느 하나 쉽게 해결되기 힘든 난제다.
어찌 보면 회담 성과보다 더 중요한 건 회담장 바깥의 안보 불안 가능성 문제다. 그동안 당국 간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돼 관광이나 경협 등에서 성과가 있더라도 DMZ에서 긴장 사태가 발생하면 상황이 급변한 적이 많았다. 남북관계가 좋았던 시기에 북한의 서해상 도발이나 핵·미사일 시험 등이 발생하면 일순간 남북관계가 얼어붙었다. 2006년 7월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 이후에는 쌀 지원마저 중단된 경험도 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쏜 상황에서 국민적 이해와 동의가 필요한 대북 지원을 계속할 수 없다는 정부의 입장에서였다.
남북군사회담을 통한 한반도 긴장완화와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는 이 점에서도 절실하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정부와 군이 일체화된 우리와 달리 북한은 노동당의 영도 아래 국가(정부)가 있고 당의 무장력으로서 군대는 내각과 별도로 존재한다. 2000년부터 21차례 진행된 남북 장관급회담 초기에 국방부 대표가 참석하다가 빠진 것도 대화일꾼으로 구성된 북측 대표단에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국회담에서 관계개선 및 교류협력 관련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북한군이 언제든 비토를 놓을 수 있는 북측 권력구조를 고려할 때 이를 관리할 별도의 메커니즘이 있어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6·25 이후의 적대관계와 북핵 문제, 대북 제재 등이 뒤얽혀 복잡한 장기적 과제로 남아 있다. 평화 제도화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보장 없이 한반도 평화는 이룰 수 없다. 남북대화 역시 군사적 신뢰구축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일 수 있다. 한반도 평화, 군사적 신뢰구축 위에 바로 서야 한다.
서주석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출처: 중앙일보] [한반도 워치] 한반도 평화는 군사적 신뢰부터 구축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