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57,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 이진충의 난 이전-1)

상 상 2015. 11. 13. 18:10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57,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 이진충의 난 이전-1)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1) 연표: 당 고종 사망 후 이진충의 난 발생 전까지(684~ 696)

2) 연표 분석 및 해설

3) 요약

 

 

1) 연표: 당 고종 사망 후 이진충의 난 발생 전까지(684~ 696)

 

이 글의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

당 고종이 죽은 68312월로 글을 마감하였으므로 이 글은 684년부터 시작한다.

 

684년부터 696년까지 당나라와 그 주변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련 사료를 연도순으로 풀어놓은 연표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 연표는 이제까지 올린 신구당서 돌궐전, 토번전 등의 관련 사료를 연도(年度) 순으로 작성한 것임)

 

 

< 연표: 당고종 사망 후(684) ~ 이진충의 난 이전(6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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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사

684

문명 원년(684), (아사나골돌록이) 삭주를 공격해 백성들과 관리를 죽이거나 사로잡아가자 ()측천이 조칙을 내려 좌무()위대장군 정무정을 선우도안무대사로 삼아 (돌궐의 침입에) 대비하게 했다.

<구당서 돌궐전>

686

수공 2(686)(아사나)골돌록이 또한 삭()와 대() 등의 주를 공격하자 (이에) 좌옥검위중랑장 순우처평을 양곡도총관으로 삼아 부장(副將)인 중랑장 포영절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구원하러 달려가게 해서 군대가 흔주에 이르러, 적과 싸웠으나 크게 패해 죽은 병사들이 5천여 명이나 되었다.<구당서 돌궐전>

687

(수공)3(687)골돌록과 원진이 또 창평에 침구하자조서로 좌응양위대장군 흑치상지로 하여금 격퇴해 물리치도록 명하였다.

 

그해 8또 삭주에 침구하자다시 (흑치)상지를 연연도대총관으로 삼아적을 황화퇴에서 쳐서대파하고도망가는 (적을) 4십여리나 추격하니도적의 무리가 드디어 적북(고비사막 북쪽)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우감문위중랑장 찬보벽이 또 정병 13천명을 통솔하여 장성밖으로 나가 끝까지 쫓았다가도리어 골돌록에게 패하여전군이 다 몰살하고()보벽은 가볍게 무장한 말로 도망쳐 돌아왔다.

 

애초에()보벽이 (흑치)상지가 적을 격파하는 것을 보고재빠르게 표를 올려 그 나머지 무리를 끝까지 (추격하겠다고) 청하자측천이 조서로 (흑치)상지와 ()보벽으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여멀리서 성원하도록 명하였다.

()보벽은 적을 하루만에 깰수 있다고 생각하고공을 탐내 먼저 행군하였으며또 사람에게 장성 2천여리에 나가 (적을) 엿보도록 명령하였는데원진 등의 부락이 모두 대비를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고마침내 무리를 통솔하고 엄습하였다.

이미 이르러또 사람을 보내 적에 대해 보고를 받고준비를 갖추고 출전하라고 명령을 내리니드디어 적에게 뒤집혔으며(패배를 당했으며)()보벽은 이에 연좌되어 형벌을 받아 죽었다.

 

측천은 대노하여골돌록을 불졸록으로 고쳤다. 원진은 이후에 병사를 거느리고 돌기시를 토벌하였으나전장에서 전사하였다. 골돌록은천수 연간(690~691) 중에 병으로 죽었다.

<이상 구당서 돌궐전>

 

이듬해(687) [돌궐이] 창평[]에 쳐들어오자 우응양위대장군 흑치상지가 공격해 격퇴했다. 다시 [돌궐이] 삭주 땅으로 들어오자 [흑치]상지가 황화퇴(黃花堆: 지금 산서성 응현 서북 30리에서 그들과 싸워 돌궐을 패배시켰고 도망가는 것을 40리나 쫓아가자 고비를 지나 달아났다. 우감문위중랑장 찬보벽이 쫓는 일을 맡았는데, 돌궐을 바로 깨뜨려 요행으로 공을 얻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서 바로 첩자를 불러 모아 장성 밖에 2천 리까지 내보냈으며 첩자가 돌궐의 대비가 없다고 하자 바로 습격했다. 도착하려고 할 때 군에 말이 새서 돌궐이 백성을 정리해 나오자 모두 싸우다 죽고 패했는데, []보벽만이 도망쳐왔고 전군은 몰살을 당했다. 무후(武后)가 화가 나서 []보벽을 죽이고, 골돌록을 불졸록(不卒祿)이라고 했다. 얼마 있다가 [아사덕]원진이 돌기시를 공격해 싸우다 죽었다. <신당서 돌궐전>

689

영창 원년(689) 군대를 거느리고 토번 정벌에 나섰으나 지지부진하니, ()대가의 죄를 물어, 포주에 유배되었고, ()온고는 처형되었다. ()대가는 본래 군대를 통솔할만한 재주가 없었는데 이때 낭패를 보아, 사졸은 기근에 고생하다 모두 죽고 그 시신이 구덩이를 전전했다. 그 다음해, 문창우상 잠장천을 무위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토번을 토벌하게 했는데, 그는 도중에 돌아오고 군대는 끝내 출발하지 않았다.

<구당서 토번전>

 

영창 원년(689)에 조서를 내려 문창우상(文昌右相) 위대가를 안식도대총관으로 삼고, 안서대도호 염온고는 그를 보좌하게 하여 토번을 토벌하도록 했는데 군대를 머물게 하고 전진하지 않아 각각 사형에 처하고 귀양 보냈다. 이듬해 다시 조서를 내려 문창우상 잠장천을 무위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토번을 토벌하게 했는데 진군하다 중간에 토벌을 취소했다.<신당서 토번전>

690

그 이듬해(690) 대수령 갈소가 귀천부(貴川部)와 당항의 무리 30만을 이끌고 항복했는데 무후가 우옥검위장군 장현우를 안무사로 삼고 군대 2만을 거느리고 가서 마중하게 했는데 대도수(大度水)에 이르렀을 때 토번이 갈소를 잡아 갔다. 그러나 다른 추장 잠삽(昝插)이 다시 강족과 오랑캐 8천을 거느리고 오자 ()현우가 즉시 그 부중을 엽주(葉州: 사천성 청계현 서남)에 머물게 하고 잠삽을 자사로 임명했다. 대도산(大度山)에 비석을 세워 전공을 기록했다.

<이상 신당서 토번전>

692

여의 원년(692) 토번의 대수령(大首領) 갈소(曷蘇)가 그 수하와 귀천부락을 이끌고 항복하길 청하니, 측천(則天)이 우옥검위대장군 장현우로 하여금 정예 병사 2만을 이끌고 가서, 안무사가 되어 이들을 받아들이게 했다. 부대가 대도수(大渡水)에 머물렀을 때, 갈소의 일이 누설되어 본국(토번)에 사로잡혔다. 또한 대수령 잠추가 강족 부락 8천여 명을 이끌고 ()현우를 만나 귀부하였고, 이에 ()현우는 그 부락을 엽천주(葉川州: 사천성 청계현 서남?)에 두고, 잠추를 자사로 삼았으며, 이윽고 대도서산에 비석을 세워 공을 새기고 돌아왔다.<구당서 토번전>

692

가을 7큰 비로낙수가 뜨고 넘쳐표류한 거주민이 5천여 가()여서사신을 보내 돌아보며

(안부를)묻고 나라의 곡식을 꾸어 주었다.< 구당서 측천 본기 >

 

8월 갑술일황하가 넘쳐황하의 남쪽 고을이 파괴되었다.< 신당서 측천본기 >

9월 무술일큰 안개가 끼었다.< 신당서 측천본기 >

 

9월 경자일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연호를 장수로 고쳤다.< 신구당서 측천본기 >

10, 측천무후는 왕효걸을 무위도행군총관에 임명하여, 서주도독 당휴경· 좌무위대장군 아사나충절을 이끌고 가서 토번을 격파하게 하니 그 무리를 크게 파하고 안서 4진을 회복해 안서도호부를 구자(龜茲)에 두고 병사를 주둔시켜 지키게 한다.

< 신구당서 측천본기 >

 

장수 원년(692) 무위군총관 왕효걸이 토번의 무리를 크게 파하고, 구자, 우전, 소륵, 쇄엽 등 4개의 진()을 수복했는데, 이윽고 구자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고 군사를 내어 이를 지키게 하였다.

<구당서 토번전>

 

그해 또 조서를 내려 우응양위장군 왕효걸을 무위도행군총관에 임명하여, 서주도독 당휴경· 좌무위대장군 아사나충절(阿史那忠節)을 이끌고 가서 토번을 격파하게 하니 그 무리를 크게 파하고 4(: 안서4)을 회복해 안서도호부를 구자(龜茲)에 두고 병사를 주둔시켜 지키게 했다. 당시 사람들이 [안서] 4()의 존폐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중략: 쓸모없는 내용임).....[그러나] 의논은 중지되었다.

 

이때 수령 발론찬이 돌궐의 가짜 가한(可汗) 아사나퇴자와 함께 남쪽으로 쳐들어와 왕효걸과 냉천(冷泉)에서 싸웠으나 패해 달아났다. 쇄엽진수사(碎葉鎭守使) 한사충이 이숙몰사성(泥熟沒斯城)을 파했다.

<이상 신당서 토번전>

693

1계해일황사비(皇嗣妃: 황태자비) 류씨와 두씨를 죽였다.(구당서 측천 본기)

2상방감 배비궁이 황태자와 몰래 만나는 일에 연루되어도읍의 저자에서 요참하였다.

< 구당서 측천 본기 >

 

묵철이라는 자는골돌록의 아우이다. 골돌록이 죽었을때그 아들이 아직 어려서묵철이 마침내 그 지위를 찬탈하여스스로 가한에 즉위하였다.

 

장수2(693)무리를 통솔하고 영주에 침구하여백성과 관리를 죽이고 약탈하니()측천이 백마사의 중 설회의를 대북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18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토벌하도록 보냈으나적을 만나지 못하자얼마 안되어 군대를 돌려 돌아왔다.

 

묵철이 잠시 후 사신을 보내 내조하니()측천이 크게 기뻐하며좌위대장군을 제수하고귀국공으로 책봉하며재물 5천단을 하사하였다. 다음해다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또 천선가한을 덧붙여 제수하였다.

<이상 구당서 돌궐전>

 

묵철이 스스로 즉위해 가한이 되었고, [가한의] 자리를 뺏은 지 몇 년이 지나자 비로소 영주를 공격해 병사와 백성들을 많이 죽이고 잡아갔다. 무후가 설회의를 삭방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내사(內史) 이소덕을 행군장사로 삼고, 봉각란대평장사 소미도를 사마로 삼아 삭방도총관 계필명(계필하력의 아들), 안문도총관 왕효걸, 위화도총관 이다조, 풍안도총관 진령영, 한해도총관 진양명 등 대저 18명의 장군과 병사를 거느리고 장성을 나아가 중국[]과 다른 족속[] 보병과 기병을 뒤섞어 공격했으나 돌궐을 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무후가] 얼마 있다가 []효걸을 삭방도행군총관으로 삼아 변경을 방비하라고 명령했다.

<신당서 돌궐전>

695

증성 원년(695)에 흠릉과 찬파가 임조(臨洮)를 공격하니 왕효걸이 숙변도대총관이 되어 소라한산(素羅汗山)에서 싸웠고 오랑캐가 패해 돌아갔다. [토번이] 양주(涼州: 감숙성 무위시)를 공격했는데 도독(都督)을 죽였다.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하면서 4진에서 철군할 것을 약속하고, 십성(十姓)의 땅을 분할하기를 청했다. 무후(武后)가 조서를 내려 통천위(通泉尉) 곽원진을 사신으로 가게 했는데 도중에 흠릉을 만났다. 곽원진이 말하기를, “녹동찬은 조정을 받들어 섬기면서 우호를 맹세함에 다함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함부로 관계를 단절하고 매년 변경을 침범하니, 아버지는 통교하였는데 아들이 그것을 끊었다. 그것이 효도인가? 아버지는 받들었는데 아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이 충성인가?”라고 하였다. 흠릉이 말하기를, “그렇다. 천자께서 화평을 허락하여 두 나라가 국경의 수비를 없애고, 십성돌궐(十姓突厥)·4(四鎭)이 각기 군장을 세워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지킨다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곽원진이 말하기를, “당은 십성(十姓)·4(四鎭)을 통해 서쪽 땅을 진무하고 여러 나라의 주군이 되었으니 다른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며 여러 부()는 토번과는 달라 오랫동안 당에 편입된 백성들이다.”라고 하였다. 흠릉이 말하기를, “사신은 내가 여러 부()를 분할하여 당의 변환(邊患)을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만약 토지와 재물을 탐했다면 청해(靑海황천(湟川)이 가까운데 지금 그곳을 버리고 다투지 않음은 또 왜인가? 돌궐의 여러 부는 넓디 넓은 사막 중에 있으며 중국과는 매우 먼 거리에 있는데 어찌 만 리 밖의 땅을 다투는가? 또한 [당조는] 사방의 오랑캐를 모두 신하로 삼고 겸병하여 먼 외국의 변경도 멸하지 않은 곳이 없는데 오직 토번만이 나라를 지키고 있으니 이는 단지 형제(흠릉 형제)가 삼가 주의하여 서로 보전됨을 얻었을 뿐이다. 십성(十姓) 중 오돌륙(五咄陸: 서돌궐 부족)은 안서(安西)[도호부]에서 가까우나 토번에서는 멀고, 사근(俟斤: 서돌궐 10성 부족의 하나)은 우리 땅에서 큰 사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기병이 말을 빠르게 달려 돌파하여도 열흘에 이르기 어려우니 걱정되는 점이다. 오해(烏海황하(黃河)의 땅은 산천이 매우 깊고 험준하며 병에 걸리기 쉬워서 원래 당군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만약 진군해 온다 해도 약한 군대와 나약한 장수가 오랑캐에 당하기 쉬우니 그런 까닭으로 내가 [이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지 여러 부를 엿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감주(양주()는 적석(積石: 적석군-積石軍. 청해성 귀덕현 동쪽)으로부터 2천리 거리에 있는데 넓은 곳은 수백에도 못 미치고, 좁은 곳은 겨우 백 리이니 내가 만약 장액(張掖옥문(玉門: 옥문관. 감숙성 돈황 서쪽)에서 출발하면 그대의 나라가 봄에는 농사짓지 못하고 가을에는 수확할 수 없어 5~6년도 되지 않아 서쪽을 끊을 수 있다. 지금 땅을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이 역시 우리를 걱정할 것은 없다. 청해(靑海)의 전투에서 황인소가 화평을 약속했는데 변경을 지키는 병사가 경계하지 않은 틈에 최지변이 사근을 지나 우리 소와 양 만 두를 약탈하였으니 이를 구하고자 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토번이 사신을 파견해 다시 간곡히 청하였으나 곽원진이 강력히 불가함을 주장하니 무후가 그의 의견을 따랐다.

<신당서 토번전>

696

1월 갑인일누사덕을 숙변도 행군부총관으로 삼아토번을 쳤다.<신당서 측천본기>

3월 임인일왕효걸 및 누사덕이 토번과 소라한산에서 싸웠으나패하였다.

<신당서 측천 본기>

 

만세등봉 원년(696) 3월 왕효걸이 다시 숙변도대총관이 되어, 부총관 누사덕을 거느리고 토번의 장군 논흠릉, 찬파와 소라한산에서 싸웠는데, 관군(당나라군)이 패배하니, ()효걸은 죄를 입어 면직되었다.

<구당서 토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