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년 (AD 847) : 평의전과 임해전을 거듭 수리하였다.
[번역문]
9년(847) 봄 2월에 평의전(平議殿)과 임해전(臨海殿) 두 전각(殿閣)을 거듭 수리하였다. 여름 5월에 이찬 양순(良順)과 파진찬 흥종(興宗)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가을 8월에 왕자를 왕태자(王太子)로 봉하였다. 시중 김여(金茹)가 죽었으므로 이찬 위흔(魏昕)을 시중으로 삼았다.
[원문]
九年 春二月 重修平議·臨海二殿 夏五[주석7]月 伊湌良順 波珍湌興宗等叛 伏誅 秋八月 封王子爲王太子 侍中金茹卒 伊湌魏昕爲侍中
10 년 (AD 848) :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번역문]
10년(848)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시중 위흔이 관직에서 물러나고, 파진찬 김계명(金啓明)을 시중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원문]
十年 春夏旱 侍中魏昕退 波珍湌金啓明爲侍中 冬十月 天有聲如雷
11 년 (AD 849) : 이찬 의정(義正)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번역문]
11년(849) 봄 정월에 상대등 예징이 죽었으므로 이찬 의정(義正)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이찬 김식(金式)과 대흔(大昕) 등이 반란을 꾀하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고, 대아찬 흔린(昕鄰)이 연루되어 죄를 받았다.
[원문]
十一年 春正月 上大等禮徵卒 伊湌義正爲上大等 秋九月 伊湌金式[주석8]·大昕等叛 伏誅 大阿湌昕鄰緣坐罪
12 년 (AD 850) : 봄 정월에 토성(土星)이 달에 들어갔다.
[번역문]
12년(850) 봄 정월에 토성(土星)이 달에 들어갔다. 서울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사형죄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원문]
十二年 春正月 土星入月 京都雨土 大風拔木 赦獄囚殊[주석9]死已下
13 년 (AD 851) : 청해진을 폐하고 사람들을 벽골군으로 옮겼다.
[번역문]
13년(851) 봄 2월에 청해진(淸海鎭)을 폐지하고 그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당나라에 갔던 사신 아찬 원홍(元弘)이 불경과 부처의 치아(齒牙)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교외에 나가 맞이하였다.
[원문]
十三年 春二月 罷淸海鎭 徙其人於碧骨郡 夏四月 隕霜 入唐使阿湌元弘 䝴佛經幷佛牙來 王出郊迎之
14 년 (AD 852) : 파진찬 진량을 웅천주 도독으로 삼았다.
[번역문]
14년(852) 봄 2월에 파진찬 진량(眞亮)을 웅천주(熊川州) 도독으로 삼았다. 조부(調府)에 불이 났다.
가을 7월에 명학루(鳴鶴樓)를 거듭 수리하였다. 겨울 11월에 왕태자가 죽었다.
[원문]
十四年 春二月 波珍湌眞亮爲熊川[주석10]都督 調府火 秋七月 重修鳴鶴樓 冬十一月 王太子卒
15 년 (AD 853) : 서남지방의 주와 군에 재해가 있었다.
[번역문]
15년(853) 여름 6월에 홍수가 났다.
가을 8월에 서남지방의 주(州)와 군(郡)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원문]
十五年 夏六月 大水 秋八月 西南州郡 蝗
17 년 (AD 855) : 사자를 보내 서남지방의 백성을 위문하였다.
[번역문]
17년(855) 봄 정월에 사자를 보내 서남지방의 백성을 위문하였다.
겨울 12월에 진각성(珍閣省)에 화재가 났고, 토성(土星)이 달에 들어갔다.
[원문]
十七年 春正[주석11]月 發使撫問西南百姓 冬十二月 珍閣省災 土星入月
19 년 (AD 857) :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문성이라 하고
[번역문]
19년(857) 가을 9월에 왕이 병환이 났으므로 유조(遺詔)를 내려 말하였다.
『과인은 보잘 것 없는 자질로 높은 지위에 있어, 위로는 하늘로부터 죄를 얻을까 두렵고 아래로는 사람들 마음으로부터 신망을 잃을까 염려스러워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삼가하고 두려워하여 마치 깊은 못과 얇은 얼음을 건너는 것과 같았다.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여러 신하가 좌우에서 도와 준 데 힘입어 왕위를 떨어뜨리지 않았는데, 지금 갑자기 병이 들어 열흘이나 되었으니 정신없는 사이에 아침 이슬보다 먼저 사라질까 걱정이다. 생각컨대 선조로부터 전해져온 큰 사업에 임금이 없어서는 안되고, 군사와 정치의 중요한 일들은 잠시도 버려둘 수가 없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서불한 의정(誼靖)은 앞 임금의 손자이고 나의 숙부로, 효성과 우애가 있고 총명하며 민첩하고 너그럽고 인자하다.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의 정치를 도와 위로는 종묘를 공경히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돌보아 기를 만하다. 이에 무거운 짐을 벗어 어질고 덕있는 사람에게 맡긴다. 부탁할 사람을 얻었으니 또 무엇이 한스럽겠는가? 하물며 태어나면 죽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음은 만물의 큰 법칙이고, 수명의 길고 짧음은 천명(天命)의 떳떳한 분수이다. 죽는 것은 이치에 따라 이르는 것이니 살아있는 사람은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그대 여러 신하들은 힘껏 충성을 다하고 죽은 사람을 보내고 산 사람을 섬기는데 혹시라도 예절에 어긋나지 말도록 하라! 나라 안에 널리 알려 나의 뜻을 분명하게 알게 하라!』 7일이 지나서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문성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
[원문]
十九年 秋九月 王不豫 降遺詔曰 『寡人以眇末之資 處崇高之位 上恐獲罪於天鑑 下慮失望於人心 夙夜兢兢 若涉淵氷 賴三事大夫 百辟卿士 左右挾維 不墜重器 今者 忽染疾疹 至于旬日 怳惚之際 恐先朝露 惟祖宗之大業 不可以無主 軍國之萬機 不可以暫廢 顧惟舒弗邯誼靖 先皇之令孫 寡人之叔父 孝友明敏 寬厚仁慈 久處台[주석12]衡 挾贊王政 上可以祗奉宗廟 下可以撫育蒼生 爰釋重負 委之賢德 付託[주석13]得人 夫復何恨 况生死始終 物之大期 壽夭脩短 命之常分 逝者可以達理 存者不必過哀 伊爾多士 竭力盡忠 送往事居 罔或違禮 布告國內 明知朕懷』 越七日 王薨 諡曰文聖 葬于孔雀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