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덕왕 0 년 (AD 809) : 헌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헌덕왕(憲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언승(彦昇)이고 소성왕(昭聖王)의 친동생이다. 원성왕 6년에 사신으로서 당나라에 갔다 와서 대아찬의 관등을 받았고, 7년에는 반역한 신하를 죽임으로써 잡찬이 되었으며, 10년에 시중이 되었고, 11년에 이찬으로 재상이 되었다. 12년에 병부령이 되었고 애장왕 원년에 각간이 되었으며, 2년에 어룡성 사신(私臣)이 되었고 얼마 안 있어 상대등이 되었다가 이때 와서 즉위하였다. 왕비는 귀승부인(貴勝夫人)인데 각간 예영(禮英)의 딸이다. 이찬 김숭빈(金崇斌)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이찬 김창남(金昌南) 등을 당나라에 보내 왕의 죽음을 알렸다. 헌종이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 섭어사중승(攝御史中丞) 최정(崔廷)을 보내면서 신라의 볼모 김사신(金士信)을 부사로 삼아 부절을 가지고 조문· 제사하고, 왕을 책립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지절(持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雞林州諸軍事) 겸 지절충영해군사(持節充寧海軍使) 상주국(上柱國) 신라왕(新羅王)으로 삼고 아내 정씨(貞氏)를 책립하여 왕비로 삼았으며, 대재상 김숭빈(金崇斌) 등 세 사람에게 문극(門戟)을 주었다.<살펴보건대 왕비는 각간 예영(禮英)의 딸인데, 지금 정(貞)씨라 하니 모를 일이다.> [원문] 憲德王立 諱彦昇 昭聖王同母弟也 元聖王六年 奉使大唐 受位大阿湌 七年 誅逆臣爲迊湌 十年爲侍中 十一年 以伊湌爲宰相 十二年爲兵部令 哀莊王元年爲角干 二年爲御龍省私臣 未幾爲上大等 至是卽位 妃貴勝夫人 禮英角干女也 以伊湌金崇斌爲上大等 秋八月 大赦 遣伊湌金昌南等入唐 告哀 憲宗遣職方員外郞攝御史中丞崔廷 以其質子金士信副之 持節吊祭 冊立王爲開府儀同三司 檢校太[주석1]尉 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 上柱國新羅王 冊妻貞氏爲妃 賜大宰相金崇斌等三人門戟 按王妃禮英角干女也 今云貞氏 未詳 2 년 (AD 810) : 봄 정월에 파진찬 양종을 시중으로 삼았다. [번역문] 2년(810) 봄 정월에 파진찬 양종(亮宗)을 시중으로 삼았다. 하서주(河西州)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2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자를 보내 나라안 제방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가을 7월에 유성이 자미(紫微)에 들어갔고, 서원경에서 흰 꿩을 바쳤다. 겨울 10월에 왕자 김헌장(金憲章)을 당나라에 보내 금·은으로 만든 불상과 불경 등을 바치고 아뢰기를 “순종(順宗)을 위하여 명복을 빕니다.”라 하였다. 유성이 왕량(王良) [별자리]로 들어갔다. [원문] 二年 春正月 以波珍湌亮宗爲侍中 河西州進赤烏[주석2] 二月 王親祀神宮 發使修葺國內隄防 秋七月 流星入紫微 西原京進白雉 冬十月 遣王子金憲章入唐 獻金銀佛像及佛經等 上言 “爲順宗祈福” 流星入王良 3 년 (AD 811) : 시중 양종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번역문] 3년(811) 봄 정월에 시중 양종(亮宗)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이찬 원흥(元興)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에 이찬 웅원(雄元)을 완산주 도독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처음으로 평의전(平議殿)에 나아가 정사(政事)를 처리하였다. [원문] 三年 春正月 侍中亮宗以病免 伊湌元興爲侍中 二月 以伊湌雄元爲完山州都督 夏四月 始御平議殿聽政 4 년 (AD 812) : 이찬 충영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번역문] 4년(812) 봄에 균정(均貞)을 시중으로 삼고, 이찬 충영(忠永)의 나이가 70세였으므로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가을 9월에 급찬 숭정(崇正)을 북쪽 나라[北國]에 사신으로 보냈다. [원문] 四年 春 以均貞爲侍中 以伊湌忠永年七十 賜几杖 秋九月 遣級湌崇正使北國 5 년 (AD 813) : 정월에 이찬 헌창을 무진주 도독으로 [번역문] 5년(813) 봄 정월에 이찬 헌창(憲昌)을 무진주 도독으로 삼았다. 2월에 시조묘에 배알하였다. 현덕문(玄德門)에 불이 났다. [원문] 五年 春正月 以伊湌憲昌爲武珍州都督 二月 謁始祖廟 玄德門火 6 년 (AD 814) : 숭례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번역문] 6년(814) 봄 3월에 숭례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흥이 한껏 올라 왕이 거문고를 타니, 이찬 충영(忠榮)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여름 5월에 나라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났으므로 사자를 보내 수해를 당한 주와 군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1년 조세[租調]를 면제해 주었다. 가을 8월에 서울에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어 밤과 같았다. 무진주 도독 헌창이 [중앙에] 들어와 시중이 되었다. 겨울 10월에 대사 검모(黔牟)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원문] 六年 春三月 宴羣臣於崇禮殿 樂極 王鼓[주석3]琴 伊湌忠榮起舞 夏五月 國西大水 發使撫問經水州郡人民 復一年租調 秋八月 京都風霧如夜 武珍州都督憲昌 入爲侍中 冬十月 黔牟大舍妻 一産三男 7 년 (AD 815) :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였다. [번역문] 7년(815)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였다. 헌종이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어 주었으며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여름 5월에 눈이 내렸다. 가을 8월 초하루 기해에 일식이 있었다.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큰 기근이 들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으므로 군사를 내어 이를 토벌하였다. 큰 별이 익성(翼星)과 진성(軫星) 사이에 나타나 서쪽으로 향하여 갔는데, 뻗쳐진 빛의 길이가 여섯 자쯤 되고 넓이가 두 치[寸] 가량 되었다. [원문] 七年 春正月 遣使朝唐 憲宗引見 宴賜有差 夏五月 下雪 秋八月己亥朔 日有食之 西邊州郡大飢 盜賊蜂起 出軍討平之 大星出翼軫間 指庚 芒長六許尺 廣二許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