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년 (AD 790) : 봄 정월에 종기(宗基))를 시중으로 삼았다 [번역문] 6년(790) 봄 정월에 종기(宗基))를 시중으로 삼았다.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였는데, 전주 등 일곱 주(州)의 사람을 징발하여 공사를 일으켰다.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3월에 일길찬 백어(伯魚)를 북쪽 나라[北國])에 사신으로 보냈다. 크게 가물었다. 여름 4월에 금성[太白]과 진성(辰星))이 동정(東井))에 모였다. 5월에 곡식을 내어 한산주와 웅천주 두 주(州)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원문] 六年 春正月 以宗基爲侍中 增築碧骨堤 徵全州等七州人興役 熊川州進赤烏 三月 以一吉湌伯魚使北國 大旱 夏四月 太[주석9]白辰星 聚于東井 五月 出粟賑漢山·熊川二州饑民 7 년 (AD 791) : 봄 정월에 왕태자가 죽어 시호를 혜충이라 [번역문] 7년(791) 봄 정월에 왕태자가 죽어 시호를 혜충(惠忠)이라 하였다. 이찬 제공(悌恭)이 반역하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웅천주의 대사 향성(向省)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겨울 10월에 서울에 눈이 세 자 내렸고, 얼어 죽은 사람이 있었다. 시중 종기(宗基)가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대아찬 준옹(俊邕))을 시중으로 삼았다. 11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내성 시랑(內省侍郞) 김언(金言)을 삼중아찬으로 삼았다. [원문] 七年 春正月 王太子卒 諡曰惠忠 伊湌悌恭叛 伏誅 熊川州向省大舍妻 一産三男 冬十月 京都雪三尺 人有凍死 侍中宗基免 大阿湌俊邕爲侍中 十一月 京都地震 內省侍郞金言爲三重阿湌 8 년 (AD 792) : 7월에 당나라에 미녀를 바쳤다. [번역문] 8년(792) 가을 7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김정란(金井蘭))을 바쳤다. 그 여자는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미인으로 몸에서 향내가 났다. 8월에 왕자 의영(義英))을 태자로 봉하였다. 상대등 충렴이 죽었으므로 이찬 세강(世强)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준옹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이찬 숭빈(崇斌))을 시중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초하루 임자에 일식이 있었다. [원문] 八年 秋七月 遣使入唐 獻美女金井蘭 其女國色身香 八月 封王子義英爲太[주석10]子 上大等忠廉卒 伊湌世强爲上大等 侍中俊邕病免 伊湌崇斌爲侍中 冬十一月壬子朔 日有食之 9 년 (AD 793) : 8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번역문] 9년(793) 가을 8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벼가 쓰러졌다. 나마 김뇌(金惱)가 흰 꿩을 바쳤다. [원문] 九年 秋八月 大風折木偃禾 奈麻金惱獻白雉 10 년 (AD 794) :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태자 의영이 죽어 [번역문] 10년(794) 봄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태자 의영(義英)이 죽어 시호를 헌평(憲平)이라 하였다. 시중 숭빈이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잡찬 언승(彦昇))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봉은사(奉恩寺))를 처음으로 세웠다. 한산주에서 흰 새를 바쳤다. 궁궐 서쪽에 망은루(望恩樓))를 세웠다. [원문] 十年 春二月 地震 太子義英卒 諡曰憲平 侍中崇斌免 以迊湌彦昇爲侍中 秋七月 始創奉恩寺 漢山州進白鳥[주석11] 起望恩樓於宮西 11 년 (AD 795) : 정월에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을 태자로 [번역문] 11년(795) 봄 정월에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俊邕)을 태자로 봉하였다. 여름 4월에 가물었으므로 몸소 죄수들의 정상을 살폈다. 6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원문] 十一年 春正月 封惠忠太子之子俊邕爲太子 夏四月 旱 親錄囚 至六月乃雨 秋八月 隕霜害穀 12 년 (AD 796) : 서울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번졌으므로 [번역문] 12년(796) 봄에 서울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번졌으므로 왕이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여름 4월에 시중 언승을 병부령으로 삼고 이찬 지원(智原))을 시중으로 삼았다. [원문] 十二年 春 京都飢疫 王發倉廩賑恤之 夏四月 侍中彦昇爲兵部令 伊湌智原爲侍中 13 년 (AD 797) : 나라 동쪽 지방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고 [번역문] 13년(797) 가을 9월에 나라 동쪽 지방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고, 홍수가 나서 산이 무너졌다. 시중 지원이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아찬 김삼조(金三朝))를 시중으로 삼았다. [원문] 十三年 秋九月 國東蝗害穀 大水山崩 侍中智原免 阿湌金三朝爲侍中 14 년 (AD 798) : 3월에 궁궐 남쪽의 누교에 화재가 났고, [번역문] 14년(798) 봄 3월에 궁궐 남쪽의 누교(樓橋)에 화재가 났고, 망덕사(望德寺)의 두 탑이 마주 부딪쳤다. 여름 6월에 가물었고 굴자군(屈自郡))의 대사 석남오(石南烏)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겨울 12월 29일에 왕이 죽어 시호를 원성(元聖)이라 하였다. 유언에 따라 널을 들어 봉덕사 남쪽에서 불태웠다.)<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정원(貞元) 14년(798)에 경신(敬信)이 죽었다.』) 하였고, 통감(通鑑)에는 『정원 16년(800)에 경신이 죽었다.』)고 하였는데 본사(本史)로써 상고해 보면 통감이 잘못이다.> [원문] 十四年 春三月 宮南樓橋災 望德寺二塔相擊 夏六月 旱 屈自郡石南烏大舍妻 一産三男一女 冬十二月二十九日 王薨 諡曰元聖 以遺命 擧柩燒於奉德寺南 唐書云 『貞元十四年 敬信死』 通鑑云 『貞元十六年 敬信死』 以本史考[주석12]之 通鑑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