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 0 년 (AD 785) : 원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원성왕(元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경신(敬信)이고 나물왕(奈勿王)의 12세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고, 왕비 김씨는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일찍이 혜공왕 말년에 반역하는 신하가 발호했을 때 선덕(宣德)은 당시 상대등으로서, 임금 주위에 있는 나쁜 무리들을 제거할 것을 앞장서 주장하였다. 경신도 여기에 참가하여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기 때문에, 선덕이 즉위하자 곧바로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자 아들이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후 왕의 조카뻘[族子]되는 주원(周元)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이때 주원은 서울[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서 주원이 건널 수가 없었다. 어느 사람이 말하였다. “임금의 큰 지위란 본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周元)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敬信)은 전 임금의 아우로 본디부터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모를 가졌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단번에 일치되어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2월에 왕의 고조부 대아찬 법선(法宣)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증조부 이찬 의관(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할아버지 이찬 위문(魏文)을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죽은 아버지 일길찬 효양(孝讓)을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삼고 아들 인겸(仁謙)을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聖德大王)과 개성대왕(開聖大王)의 두 사당을 헐고 시조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할아버지 흥평대왕과 아버지 명덕대왕으로써 5묘(五廟)를 삼았다. 문무백관들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주고, 이찬 병부령 충렴(忠廉)을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이찬 제공(悌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제공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이찬 세강(世强))을 시중으로 삼았다. 3월에 전왕의 왕비 구족왕후(具足王后)를 바깥 궁으로 내보내고 조(租) 3만 4천 섬을 주었다.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고쳤다.) [원문] 元聖王立 諱敬信 奈勿王十二世孫 母朴氏繼烏夫人 妃金氏 神述角干之女 初惠恭王末年 叛臣跋扈 宣德時爲上大等 首唱除君側之惡 敬信預之 平亂有功 洎宣德卽位 卽[주석1]爲上大等 及宣德薨 無子 群臣議後 欲立王之族子周元 周元宅於京北二十里 會大雨 閼川水漲 周元不得渡 或曰 “卽人君大位 固非人謀 今日暴雨 天其或者不欲立周元乎 今上大等敬信 前王之弟 德望素高 有人君之體” 於是 衆議翕然 立之繼位 旣而雨止 國人皆呼萬歲 二月 追封高祖大阿湌法宣爲玄聖大王 曾祖伊湌義寬爲神英大王 祖伊湌魏文爲興平大王 考一吉湌孝讓爲明德大王 母朴氏爲昭文太[주석2]后 立子仁謙爲王太子 毁聖德大王 開聖大王二廟 以始祖大王 太宗大王 文武大王及祖興平大王 考明德大王爲五廟 增文武百官爵一級 拜伊湌兵部令忠廉爲上大等 伊湌悌恭爲侍中 悌恭免 伊湌世强爲侍中 三月 出前妃具足王后於外宮 賜租三萬四千石 浿江鎭進赤烏 改摠管爲都督 2 년 (AD 786) : 여름 4월에 나라 동쪽 지방에 우박이 내려 [번역문] 2년(786) 여름 4월에 나라 동쪽 지방에 우박이 내려 뽕나무와 보리가 모두 상하였다. 김원전(金元全)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덕종(德宗)이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신라 왕 김경신(金敬信)에게 조칙을 내리오. 김원전이 가지고 온 표문과 바친 물건들을 살펴보니 모두 잘 갖추어 있었소. 경(卿)의 나라 풍속은 믿음과 의리가 두텁고 뜻을 지킴이 곧고 순수하여 일찍부터 중국을 받들어 천자의 교화에 순종하였고, 번방을 편하게 하여 모두 유교의 유풍을 받아서 예법이 시행되고 나라 안이 평온하여졌소.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천자의 대궐로 향하고 천자에 조회하는 일을 빠뜨리지 아니하였으며, 자주 사신을 보내 윗대로부터 내려온 덕을 이어 조공과 진상을 잘 하였소. 비록 바다가 멀고 넓으며 길이 멀어도 예물을 가지고 왕래하는 데는 옛 법을 좇아 충성스러움이 더욱 돋보이니, 진실로 매우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는 바이오. 내가 온 세상을 다스리고 인민의 부모가 된지라, 안으로부터 밖에 이르기까지 법도를 맞게 하고 문화를 같이하여 태평화락을 이루고 다 함께 안락장수의 길에 오를까 하오. 경은 마땅히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부지런히 백성들을 돌보아 길이 번방의 신하[藩臣]가 되어, 바다 모퉁이에 있는 나라를 평온케 하시오. 지금 경에게 나금(羅錦), 능채(綾彩)) 등 30필과 옷 한 벌, 은대접 한 개를 주노니 이르거든 받으시오. 왕비에게는 금채(錦彩), 능라(綾羅)) 등 20필과 금실로 수놓은 비단 치마 한 벌 및 은쟁반 한 개, 대재상(大宰相)) 한 사람에게는 옷 한 벌과 은주발 한 개, 차재상(次宰相)) 두 사람에게는 각각 옷 한 벌과 은주발 한 개를 주노니, 경이 받아서 나누어 주시오. 한여름이라 날씨가 몹시 더운데 경은 늘 평안하기를 바라오. 재상 이하 모두에게 아울러 안부를 전하는 바이오. 보내는 글에 나의 뜻을 모두 다 펴지 못하겠소.』 가을 7월에 가물었다. 9월에 서울[王都]의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벼 33,240섬을 내어서 진휼하였다. 겨울 10월에 또 벼 33,000섬을 내어 나누어 주었다. 대사 무오(武烏)가 병법(兵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쳤으므로, 굴압현령(屈押縣令))의 관직을 주었다. [원문] 二年 夏四月 國東雨雹 桑麥皆傷 遣金元全入唐 進奉方物 德宗下詔書曰『勑新羅王金敬信 金元全至 省表及所進奉具悉 卿俗敦信義 志秉貞純 夙奉邦家 克遵聲敎 撫玆藩服 皆禀儒風 禮法興行 封部寧乂 而竭誠向闕 述職無虧 累遣使臣 聿修貢獻 雖溟渤遐廣 道路悠長 贄幣往來 率循舊典[주석3] 忠効益著 嘉歎良深 朕君臨萬方 作人父母 自中及外 合軌同文 期致大[주석4]和 共躋仁壽 卿宜保安封內 勤恤蒼生 永作藩臣 以寧海裔 今賜卿羅錦綾綵等三十匹 衣一副 銀榼一口 至宜領之 妃錦綵綾羅等二十匹 押金線繡羅裙衣一副 銀椀一 大宰相一人 衣一副·銀椀一 次宰相二人 各衣一副 銀椀各一 卿宜領受分給 夏中盛熱 卿比平安好 宰相已下 並存問之 遣書指不多及』 秋七月 旱 九月 王都民饑 出粟三萬三千二百四十石 以賑給之 冬十月 又出粟三萬三千石 以給之 大舍武烏 獻兵法十五卷·花鈴圖二卷 授以屈押[주석5]縣令 3 년 (AD 787) : 봄 2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번역문] 3년(787) 봄 2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몸소 신궁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5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8월 초하루 신사에 일식이 있었다. [원문] 三年 春二月 京都地震 親祀神宮 大赦 夏五月 太白晝見 秋七月 蝗害穀 八月辛巳朔 日有食之 4 년 (AD 788) : 봄에 처음으로 독서삼품과}를 제정하여 [번역문] 4년(788) 봄에 처음으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제정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예기(禮記) 또는 문선(文選))을 읽어서 그 뜻에 능통하고 아울러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에 밝은 사람을 상품(上品)으로 하고, 곡례(曲禮))·논어·효경을 읽은 사람을 중품(中品)으로 하였으며, 곡례와 효경을 읽은 사람을 하품(下品)으로 하였다. 만약 오경(五經))과 삼사(三史)) 그리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에 두루 능통한 사람은 등급을 뛰어 넘어 이를 등용하였다. 전에는 단지 활쏘는 것으로 인물을 선발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고쳤다. 가을에 나라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고 누리가 발생하였으며 도적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안정시켰다. [원문] 四年 春 始定讀書三品以出身 讀春秋左氏傳 若禮記 若文選 而能通其義 兼明論語·孝經者爲上 讀曲禮·論語·孝經者爲中 讀曲禮·孝經者爲下 若博通五經·三史·諸子百家書者 超擢用之 前祇[주석6]以弓箭選人 至是改之 秋 國西旱蝗 多盜賊 王發使安撫之 5 년 (AD 789) : 봄 정월 초하루 갑진에 일식이 있었다. [번역문] 5년(789) 봄 정월 초하루 갑진에 일식이 있었다. 한산주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곡식을 내어 진휼하였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9월에 자옥(子玉)을 양근현(楊根縣) 소수(小守))로 삼으니 집사사(執事史)) 모초(毛肖)가 논박하여 말하였다. “자옥은 문적(文籍)으로 등용되지) 않았으니 지방 관직을 맡길 수 없다.” 그러자 시중이 말하였다. “비록 문적으로 등용되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학생이 되었으니 써도 좋지 않겠는가?” 왕은 이 말을 좇았다. 사론(史論): 오직 학문을 한 다음에 도리(道理)를 듣게 되고, 도리를 들은 뒤에야 사물의 근본과 말단을 밝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배운 뒤에 벼슬을 한 사람은 일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것을 먼저 하게되므로 말단은 저절로 바르게 된다. 비유하면 그물의 벼리[網] 하나를 추켜 들면 모든 그물의 고[目]가 따라서 모두 바르게 되는 것과 같다. 학문을 하지 못한 자는 이와 반대로 일의 선후(先後)와 본말(本末)의 순서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자질구레하게 정신을 지엽말단에만 기울여, 백성들로부터 긁어 모으는 것으로써 이익을 삼고 혹은 까다롭게 검찰하는 것으로 서로 높다고 하므로 비록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려고 하나 도리어 해가 된다. 이런 까닭에 학기(學記))에는 『근본을 힘쓴다.』는 말로 마쳤고, 상서(尙書)에는 『배우지 아니하면 담벽에 얼굴을 맞댄 것만 같아 일에 당해서는 오직 답답할 뿐이다.』)라 말하였으니 집사(執事) 모초(毛肖)의 한마디 말은 만대(萬代)의 모범이 될 만하다고 하겠다. [원문] 五年 春正月甲辰朔 日有食之 漢山州民饑 出粟以賙之 秋七月 隕霜傷穀 九月 以子玉爲楊根縣小守 執事史毛肖駮[주석7]言 “子玉不以文籍出身 不可委分憂之職” 侍中議云 “雖不以文籍出身 曾入大唐爲學生 不亦可用耶” 王從之 論曰 惟學焉然後聞道 惟聞道然後 灼知事之本末 故學而後仕者 其於事也 先本而末自正 譬如擧一綱 萬目從而皆正 不學者反此 不知事有先後本末之序 但區區弊精神於枝末 或掊斂[주석8]以爲利 或苛察以相高 雖欲利國安民 而反害之 是故 學記之言 終於『務本』 而書亦言 『不學牆面 蒞事惟煩』 則執事毛肖一言 可爲萬世之模範者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