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23, 삼국사기 신라 본기 -12 (35대 경덕왕 본기 -2)

상 상 2015. 8. 21. 17:48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23, 삼국사기 신라 본기 -12 (35대 경덕왕 본기 -2)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19.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출처:

1) 원 출처는 네이트(nate). 그러나 현재 네이트에 있는 삼국사기는 폐쇄되어 찾아볼 수 없음

2) 지금 삼국사기를 볼 수 있는 싸이트는 네이버로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싸이트 주소( http://terms.naver.com/list.nhn?cid=49615&categoryId=49615 )

 

 

35대 경덕왕 본기 - 2

7 (AD 748) : 봄 정월에 천구(天狗)가 땅에 떨어졌다

[번역문]

7(748) 봄 정월에 천구(天狗)가 땅에 떨어졌다. 가을 8월에 태후가 영명신궁(永明新宮)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처음으로 정찰(貞察) 1인을 두어 관리들의 잘못을 살펴 바로잡게 하였다. 아찬 정절(貞節) 등을 보내 북쪽 변경을 검찰(檢察)케 하고, 처음으로 대곡성(大谷城) 14개의 군과 현을 두었다.

 

[원문]

七年 春正月 天狗落地 秋八月 太[주석6]后移居永明新宮 始置貞察一員 糾正百官 遣阿湌貞節等 檢察北邊 始置大谷城等十四郡縣

 

8 (AD 749) : 2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번역문]

8(749) 2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에 천문박사(天文博士) 1인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인을 두었다.

 

[원문]

八年 春二[주석7]月 暴風拔木 三月 置天文博士一員 漏刻博士六員

 

9 (AD 750) : 중 대정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번역문]

9(750) 봄 정월에 시중 대정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 조량(朝良)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에 어룡성(御龍省)에 봉어(奉御) 2인을 두었다.

 

[원문]

九年 春正月 侍中大正免 伊湌朝良爲侍中 二月 置御龍省奉御二員

 

11 (AD 752) : 급찬 원신과 용방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번역문]

11(752) 3월에 급찬 원신(原神)과 용방(龍方)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동궁아관(東宮衙官)을 두었다. 겨울 10월에 창부(倉部)에 사() 3인을 더 두었다.

 

[원문]

十一年 春三月 以級湌原神 龍方爲大阿湌 秋八月 置東宮衙官 冬十月 加置倉部史三人

 

12 (AD 753) :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번역문]

12(753)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무진주(武珍州)에서 흰 꿩을 바쳤다.

 

[원문]

十二年 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乃廻 武珍州獻白雉

 

13 (AD 754) : 서울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

[번역문]

13(754) 여름 4월에 서울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 하였다.

5월에 성덕왕비(聖德王碑)를 세웠다. 우두주에서 상서로운 지초[瑞芝]를 바쳤다.

가을 7월에 왕이 관리에게 명하여 영흥사(永興寺)와 원연사(元延寺)의 두 절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8월에 가물고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시중 조량(朝良)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원문]

十三年 夏四月 京都雹 大[주석8]如鷄卵 五月 立聖德王碑 牛頭州獻瑞芝 秋七月 王命官修葺永興 元延[주석9]二寺 八月 旱蝗 侍中朝良退

 

14 (AD 755) : 봄에 곡식이 귀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번역문]

14(755) 봄에 곡식이 귀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웅천주의 향덕(向德)이란 사람은 가난하여 [어버이를] 봉양할 수 없었으므로 다리의 살을 베어 그 아버지에게 먹였다. 왕이 소문을 듣고 그에게 많은 물품을 주고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망덕사(望德寺) 탑이 흔들렸다.<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 이르기를 그 나라가 당나라를 위하여 이 절을 세웠던 까닭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하였다. 두 탑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고 높이는 13층인데, 갑자기 심하게 흔들리며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하기를 며칠 동안 그러하였다. 이 해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는 바, 아마도 그 감응이 아니었을까?> 여름 4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다. 가을 7월에 죄인을 사면하고 늙고 병든 사람과 홀아비, 홀어미, 부모없는 어린아이, 자식 없는 늙은이들을 위문하고 곡식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이찬 김기(金耆)를 시중으로 삼았다.

 

[원문]

十四年 春 穀貴民饑 熊川州向德 貧無以爲養 割股肉 飼其父 王聞 賜賚頗厚 仍使旌表門閭 望德寺塔動 唐令狐澄新羅國記曰 其國爲唐 立此寺 故以爲名兩塔相對 高十三層 忽震動開合 如欲傾倒者數日 其年祿山亂 疑其應也 夏四月 遣使入唐賀正 秋七月 赦罪人 問老疾鰥寡孤獨 賜穀有差 以伊湌金耆爲侍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