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15, 삼국사기 신라 본기 -4 (32대 효소왕 본기)

상 상 2015. 7. 31. 17:05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15, 삼국사기 신라 본기 -4 (32대 효소왕 본기)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19.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출처:

1) 원 출처는 네이트(nate). 그러나 현재 네이트에 있는 삼국사기는 폐쇄되어 찾아볼 수 없음

2) 지금 삼국사기를 볼 수 있는 싸이트는 네이버로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싸이트 주소( http://terms.naver.com/list.nhn?cid=49615&categoryId=49615 )

 

 

< 삼국사기 신라 32대 효소왕 본기 >

효소왕

 

0 (AD 692) : 효소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효소왕(孝昭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이홍(理洪)<또는 공()으로도 썼다.>이고 신문왕의 태자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로 신목왕후(神穆王后)인데, 일길찬 김흠운(金欽運)<또는 운()이라고도 하였다.>의 딸이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사신을 보내 조문·제사하고, 이어 왕을 책명하여 신라왕(新羅王)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행좌표도위대장군(行左豹韜尉大將軍) 계림주도독(雞林州都督)으로 삼았다. 좌우리방부(左右理方府)를 고쳐 좌우의방부(左右義方府)라 하였다. ()란 글자가 왕의 이름자와 저촉되었기 때문이다.

 

[원문]

孝昭王立 諱理洪 一作恭 神文王太子 母姓金氏 神穆王后 一吉湌金欽運 一云雲 女也 唐則天遣使吊祭 仍冊王爲新羅王輔國大將軍行左豹韜尉大將軍雞林州都督 改左右理方府爲左右議方府 理犯諱故也

 

1 (AD 692) : 8월에 대아찬 원선(元宣)을 중시로 삼았다.

[번역문]

원년(692) 8월에 대아찬 원선(元宣)을 중시로 삼았다. 고승 도증(道證)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천문도(天文圖)를 바쳤다.

 

[원문]

元年 八月 以大阿湌元宣爲中侍 高僧道證自唐廻 上天文圖

 

3 (AD 694) : 정월에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를 사면

[번역문]

3(694) 봄 정월에 몸소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문영(文穎)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66세였다. 이 해 겨울에 송악성(松岳城)과 우잠성(牛岑城)의 두 성을 쌓았다.

 

[원문]

三年 春正月 親祀神宮 大赦 以文穎爲上大等 金仁問在唐卒 年六十六 冬築松岳 牛岑二城

 

4 (AD 695) : 자월을 정월로 삼았다. 개원을 상대등으로

[번역문]

4(695) 자월(子月)을 정월로 삼았다. 개원(愷元)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중시 원선(元宣)이 늙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서시(西市)와 남시(南市)의 두 시장을 설치하였다.

 

[원문]

四年 以立子月爲正 拜愷元爲上大等 冬十月 京都地震 中侍元宣退老 置西南二市

 

5 (AD 696) : 정월에 이찬 당원(幢元)을 중시로 삼았다.

[번역문]

5(696) 봄 정월에 이찬 당원(幢元)을 중시로 삼았다. 여름 4월에 나라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었다.

 

[원문]

五年 春正月 伊湌幢元爲中侍 夏四月 國西旱

 

6 (AD 697) : 7월에 완산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번역문]

6(697) 가을 7월에 완산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嘉禾]을 바쳤는데, 밭고랑이 다른 줄기의 이삭이 합하여 하나로 된 것이었다. 9월에 임해전(臨海殿)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원문]

六年 秋七月 完山州進嘉禾 異畝同穎 九月 宴羣臣於臨海殿

 

7 (AD 698) : 정월에 이찬 체원을 우두주 총관으로

[번역문]

7(698) 봄 정월에 이찬 체원(體元)을 우두주(牛頭州) 총관으로 삼았다. 2월에 서울에 땅이 흔들렸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렸다. 중시 당원(幢元)이 늙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대아찬 순원(順元)을 중시로 삼았다.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으므로, 왕이 숭례전(崇禮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가을 7월에 서울에 홍수가 났다.

 

[원문]

七年 春正月 以伊湌體元爲牛頭州摠管 二月 京都地動[주석1] 大風折木 中侍幢元退老 大阿湌順元爲中侍 三月 日本國使至 王引見於崇禮殿 秋七月 京都大水

 

8 (AD 699) : 2월에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고 살별이

[번역문]

8(699) 2월에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고 살별이 동쪽에 나타났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지방물건을 바쳤다. 가을 7월에 동해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가 5일만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9월에 동해 물이 서로 맞부딪쳐 그 소리가 서울[王都]에까지 들렸다. 병기고(兵器庫) 속에서 북과 뿔피리가 저절로 소리를 내었다. 신촌(新村) 사람 미힐(美肹)이 무게가 100[] 되는 황금 한 덩이를 얻어서 바쳤으므로, 그에게 남변제일(南邊第一)의 지위를 주고 조() 100섬을 내려 주었다.

 

[원문]

八年 春二月 白氣竟天 星孛于東 遣使朝唐貢方物 秋七月 東海水血色 五日復舊 九月 東海水戰 聲聞王都 兵庫中鼓角自鳴 新村人美肹 得黃金一枚 重百分 獻之 授位南邊第一 賜租一百石

 

9 (AD 700) : 다시 인월(寅月)을 정월로 삼았다.

[번역문]

9(700) 다시 인월(寅月)을 정월로 삼았다. 여름 5월에 이찬 경영(慶永) <()을 현()으로도 썼다.>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중시 순원이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6월에 세성(歲星)이 달을 침범하였다.

 

[원문]

九年 復以立寅月爲正 夏五月 伊湌慶永 永一作玄 謀叛 伏誅 中侍順元緣坐罷免 六月 歲星入月

 

10 (AD 701) : 2월에 살별[彗星]이 달을 침범하였다.

[번역문]

10(701) 2월에 살별[彗星]이 달을 침범하였다. 여름 5월에 영암군(靈巖郡) 태수 일길찬 제일(諸逸)이 나라 일을 저버리고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였으므로, 곤장 100대를 때려 섬으로 들여보냈다.

 

[원문]

十年 春二月 彗星入月 夏五月 靈巖郡太守一吉湌諸逸 背公營私 刑一百杖 入島

 

11 (AD 702) :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효소(孝昭)

[번역문]

11(702)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지냈다.<구당서(舊唐書)에서는 장안(長安) 2(702)에 이홍(理洪)이 죽었다.하였고, 여러 고기(古記)에는 임인(702) 727일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자치통감에는 대족(大足) 3(703)에 죽었다.고 하였으니 자치통감이 잘못이다.

 

[원문]

十一年 秋七月 王薨 諡曰孝昭 葬于望德寺東 舊[주석2]唐書云 長安二年理洪卒諸古記云 壬寅七月二十七日卒而通鑑云 大足三年卒則通鑑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