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08, 구당서 신라전- 1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7. 구당서 신라전 ※ 17. 구당서 신라전의 출처: 1) 번역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통사/ 중국정사조선전/ 舊唐書/ 東夷列傳/ 新羅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舊唐書/列傳/ 卷一百九十九上/ 東夷/ 新羅 17. 구당서 동이열전 신라전(권199 상) (김)법민(法敏: 30대 문무왕)이 개요 원년(681년)에 죽으니, 그의 아들 (김)정명(政明: 31대 신문왕)이 왕위(位)를 이었다. 원문) 法敏以開耀元年卒,其子政明嗣位。 | 11) ○ 수공 2년(686년)에 (김)정명(제31대 신문왕)이 사신을 보내 내조하며, 표문을 올려 『당례』1부(部)와 기타 문장(文章)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측천(則天)은 해당 관사에 명하여 『길흉요례』와 『문관사림』 가운데 규계(規誡)가 될만한 것을 골라 쓰게 하여, 모두 50여권의 책을 만들어 주었다. 원문) 垂拱二年,政明遣使來朝,因上表請唐禮一部并雜文章,則天令所司寫吉凶要禮,并於文館詞林採其詞涉規誡者,勒成五十卷以賜之。 | 12)○ 천수 3년(692년)에 (김)정명이 죽으니, 측천은 머리를 풀고 곡을 하며 초상난 것을 알리고(거애:擧哀), 사신을 보내어 조문 제사(조제: 弔祭)하며, 그의 아들 (김)이홍(理洪:제32대 효소왕)을 책립하여 신라왕으로 삼고, 아울러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보국대장군행표도위대장군계림주도독을 잇게 하였다. 김)이홍(제32대 효소왕)이 장안 2년(702년)에 죽으니, 측천은 머리를 풀고 곡을 하며 초상난 것을 알리며(거애:擧哀) 이틀 동안 조정을 폐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아우 (김)흥광(제33대 성덕왕)을 세워 신라왕으로 삼고, 아울러 (그로) 하여금 형의 장군·도독의 호(號)를 잇게 하였다. (김)흥광(제33대 성덕왕)은 본명이 (당)태종과 같아서 선천 연간(712년)에 측천이 고쳐 준 이름이다. 원문) 天授三年,政明卒,則天為之舉哀,遣使弔祭,冊立其子理洪為新羅王,仍令襲父輔國大將軍,行豹韜衛大將軍、雞林州都督。理洪以長安二年卒,則天為之舉哀,輟朝二日,遣立其弟興光為新羅王,仍襲兄將軍、都督之號。興光本名與太宗同,先天中則天改焉 | 13)○ 개원 16년(728년), 사신을 보내 내조하여 지방물건(方物)을 바치고, 또 표문을 올려 [신라] 인(人)에게 중국의 학문과 경교(經敎)를 배우게 해 달라고 요청하니, 황상(당 현종)이 허락하였다. [개원] 21년(733년)에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로 침입하였다. 이때 (김)흥광(제33대 성덕왕)의 친척 김사란이 일찍이 입조(入朝)하여 경사(장안)에 와 머물러 있으면서 태복원외경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본국으로 돌려보내 군사를 일으켜 말갈을 토벌하게 하고, 이어서 (김)흥광(제33대 성덕왕)에게 개부의동삼사 영해군사(의 벼슬)를 더 붙여 주었다. [개원] 25년(737년)에 (김)흥광(제33대 성덕왕)이 죽으니, 조서로 태자태보를 추증하고, 이어서 좌찬선대부 형도(邢璹)를 홍려소경에 섭직시켜 신라로 보내 조문 제사(조제:弔祭)하게 하고, 아울러 그의 아들 (김)승경(承慶:제34대 효성왕)을 책립하여 아버지의 개부의동삼사 신라왕을 잇게 하였다. (형)도가 길을 떠날 때에 (당)현종이 송별시를 지어 그 서문(序文)을 쓰고, 태자 이하 모든 관원들로 하여금 시를 지어 전송하게 하였다. (당)현종이 (형)도에게,“신라는 군자의 나라로 불리며, 자못 학문을 알아서 중화(中華)와 유사한 데가 있소. 경의 학술이 강론에 능하기 때문에 이번의 사신으로 선발하여 보내는 것이오. 그 나라에 가서 경전을 천양(闡揚)하여 대국의 유교가 성대함을 알게 하오.”하였다. 또 그 나라 사람들 중에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바둑에 능한 솔부병조(率府兵曹) 양계응을 (형)도의 부사(副使)로 삼아 보냈다. (형)도 등은 그 나라에 이르러 번인(蕃人)으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그 나라의 바둑 수준은 (양)계응보다 낮았다. 그리하여 (형)도 등에게 금보(金寶) 및 약물 등의 푸짐한 선물을 주어 보냈다. 원문) 開元十六年,遣使來獻方物,又上表請令人就中國學問經教,上許之。二十一年,渤海靺鞨越海入寇登州。時興光族人金思蘭先因入朝留京師,拜為太僕員外卿,至是遣歸國發兵以討靺鞨,仍加授興光為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二十五年,興光卒,詔贈太子太保,仍遣左贊善大夫邢璹攝鴻臚少卿,往新羅弔祭,并冊立其子承慶襲父開府儀同三司、新羅王。璹將進發,上製詩序,太子以下及百僚咸賦詩以送之。上謂璹曰:「新羅號為君子之國,頗知書記,有類中華。以卿學術,善與講論,故選使充此。到彼宜闡揚經典,使知大國儒教之盛。」又聞其人多善奕碁,因令善碁人率府兵曹楊季鷹為璹之副。璹等至彼,大為蕃人所敬。其國碁者皆在季鷹之下,於是厚賂璹等金寶及藥物等。 | 14)○ 천보 2년(743년)에 (김)승경(제34대 효성왕)이 죽으니, 조서로 찬선대부 위요를 보내 가서 조문 제사(弔祭)하게 하였다. 그의 아우 (김)헌영(憲英:제35대 경덕왕)을 책립하여 신라왕으로 삼고, 아울러 형의 관작을 잇게 하였다. 원문) 天寶二年,承慶卒,詔遣贊善大夫魏曜往弔祭之。冊立其弟憲英為新羅王,并襲其兄官爵。 | 15)○ 대력 2년(767년)에 (김)헌영(제35대 경덕왕)이 죽으니, 나라사람들이 그의 아들 (김)건운(乾運:제36대 혜공왕)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어서 대신(大臣) 김은거를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입조하여 지방물건(方物)을 바치면서 책명을 더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대력] 3년(768년)에 (당)대종(代宗)이 창부랑중 겸어사중승 사자금어대 귀숭경(歸崇敬)을 보내 부절을 가지고 책서를 보내 (신라로) 가서 조문과 책명(弔冊)을 하게 하였다. (김)건운(제36대 혜공왕)을 개부의동삼사 신라왕으로 삼고, (김)건운(제36대 혜공왕)의 어머니는 태비(太妃)로 책명하였다. [대력] 7년(772년)에 사신 김표석을 보내 내조하여 새해를 축하하니(하정:賀正), 위위원외소경을 제수하여 돌려 보냈다. [대력] 8년(773년)에 사신을 보내 내조하고, 아울러 금·은·우황·어아주·조하주 등을 바쳤다. [대력] 9년(774년)에서 12년(777년)까지 해마다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는데, 혹은 한해에 두번도 왔다. 원문) 大曆二年,憲英卒,國人立其子乾運為王,仍遣其大臣金隱居奉表入朝,貢方物,請加冊命。三年,上遣倉部郎中、兼御史中丞、賜紫金魚袋歸崇敬持節齎冊書往弔冊之。以乾運為開府儀同三司、新羅王,仍冊乾運母為太妃。七年,遣使金標石來賀正,授衛尉員外少卿,放還。八年,遣使來朝,并獻金、銀、牛黃、魚牙紬、朝霞紬等。九年至十二年,比歲遣使來朝,或一歲再至。 | 16)○ 건중 4년(783년)에 (김)건운(제36대 혜공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나라의 상상(上相) 김양상(金良相:제37대 선덕왕)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원문) 建中四年,乾運卒,無子,國人立其上相金良相為王。 | 17)○ 정원 원년(785년), (김)양상(제37대 선덕왕)에게 검교태위도독계림주자사영해군사 신라왕을 제수하였다. 아울러 호부낭중 개훈으로 하여금 부절을 가지고 책명하게 하였다. 그 해에 (김)양상(제37대 선덕왕)이 죽으니, (그 나라 사람들이) 상상(上相) (김)경신(敬信:제39대 원성왕)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로) 하여금 그 관작을 잇도록 하였다. (김)경신(제38대 원성왕)은 곧 [전왕(前王)의] 종형제(從兄弟)이다. (정원) 14년(798년)에 (김)경신(제39대 원성왕)이 죽으니 그의 아들이 (김)경신(제38대 원성왕)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김)경신(제38대 원성왕)의 맏손자 준옹(俊邕:제39대 소성왕)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정원] 16년(800년)에 (김)준옹(제39대 소성왕)에게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신라왕을 제수하였다. 사봉랑중 겸 어사중승 위단으로 하여금 부절을 가지고 책명하게 하였다. (위)단이 운주(鄆州)에 이르렀을 때 (김)준옹(제39대 소성왕)이 죽고 그의 아들 (김)중흥(重興:제40대 애장왕)이 왕이 되었다는 것을 듣고 조명(詔命)으로 (위)단을 돌아오게 하였다. 영정 원년(805년)에 조서로 병부랑중 원계방을 보내 부절을 가지고 (김)중흥(제40대 애장왕)을 책립하여 왕으로 삼게 하였다. 원문) 貞元元年,授良相檢校太尉、都督雞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仍令戶部郎中蓋塤持節冊命。其年,良相卒,立上相敬信為王。令襲其官爵。敬信即從兄弟也。十四年,敬信卒,其子先敬信亡,國人立敬信嫡孫俊邕為王。十六年,授俊邕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新羅王。令司封郎中、兼御史中丞韋丹持節冊命。丹至鄆州,聞俊邕卒,其子重興立,詔丹還。永貞元年,詔遣兵部郎中元季方持節冊重興為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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