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99, 신당서 남조전- 4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6. 신당서 남조전 ※ 16. 신당서 남조전의 출처: 1) 번역문: 동북아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新唐書 卷222/ 남만전(南蠻傳) 上 中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新唐書/ 列傳/ 卷二百二十二 上/ 南蠻 上, 南詔 上 16.신당서 남조전(권222 상, 남만 상, 남조 상) 번 역 문 | 원 문 | 18) 위고는 자신의 속료인 최자시(崔佐時)를 양저미성으로 보냈다. 이 때에 토번의 사자가 많이 머물고 있었다. 은밀히 좌시에게 장가(牂牁) 사자의 옷을 입고 들어오도록 충고하였다. (최)좌시가 말하기를, “나는 당의 사자인데, 어찌 하찮은 오랭케의 복식을 입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모심이 밤에 그를 맞아들였는데, 자리와 화톳불을 설치하여 놓았다. (최)좌시가 그 자리에서 바로 천자의 뜻을 알렸다. 이모심이 속으로 토번이 두려워 돌아보니 좌우가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다. [이모심은] 눈물을 흘리며 재배(再拜)하고 명을 받들었다. (이모심은) 자신의 아들 합권(閤勸) 및 청평관에게 (최)좌시와 더불어 점창산(點蒼山: 운남성 대리시 서쪽)에서 맹(盟)을 거행하게 하였다. 재서(載書: 회맹시에 타결된 서약문서)는 네 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신사(神祠)의 석실에 보관하고, 하나는 서이수(西洱水)에 가라앉혔으며, 하나는 조묘(祖廟)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천자에게 바쳤다. 이어 병사를 동원하여 토번의 사자를 죽이고 금계(金契: 金石에 문자로 새겨 놓은 것)를 새겨 바쳤다. 그리고 조장(曹長) 가남라(叚南羅)와 조가관(趙迦寬)을 보내 좌시를 수행하여 입조토록 하였다. | 皋令其屬崔佐時至羊苴咩城。時吐蕃使者多在,陰戒佐時衣牂柯使者服以入。佐時曰:「我乃唐使者,安得從小夷服?」異牟尋夜迎之,設位陳燎,佐時即宣天子意,異牟尋內畏吐蕃,顧左右失色,流涕再拜受命。使其子閤勸及清平官與佐時盟點蒼山,載書四:一藏神祠石室,一沈西洱水,一置祖廟,一以進天子。乃發兵攻吐蕃使者殺之,刻金契以獻,遣曹長叚南羅、趙迦寬隨佐時入朝。 | 19) 전에 토번이 회골(回鶻)과 싸웠는데, 죽고 부상을 입은 자가 매우 많아 남조로부터 일만 명을 조달하려 하였다. [이에] 이모심은 토번을 습격하기로 마음먹고, 겉으로 적고 약한 척하여 오천 명만 보내겠다고 하니, [토번이] 허락하였다. 곧바로 직접 만명을 이끌고 뒤를 따라 밤낮으로 행군하여, 신천(神川)에서 토번을 대파하고 마침내 철교(鐵橋)①를 끊었다. 익사한 자가 만을 헤아렸고, 토번의 5왕을 사로잡았다. 이에 동생 진라동(溱羅棟)과 청평관 윤구관(尹仇寬) 등 27인을 [당 조정에] 보내어 지도와 지역 특산물을 바치고 ‘남조(南詔)’라는 명호를 회복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황제는 하사품을 후하게 내려 주고, (윤)구관을 좌산기상시로 삼고 고계군왕에 봉하였다. ☆참고: ①철교(鐵橋): 운남성 향격리랍현 경내에 소재. | 初,吐蕃與回鶻戰,殺傷甚,乃調南詔萬人。異牟尋欲襲吐蕃,陽示寡弱,以五千人行,許之。即自將數萬踵後,晝夜行,大破吐蕃於神川,遂斷鐵橋,溺死以萬計,俘其五王。乃遣弟湊羅棟、清平官尹仇寬等二十七人入獻地圖、方物,請復號南詔。帝賜賚有加,拜仇寬左散騎常侍,封高溪郡王。 | 20) 이듬해(794) 여름 6월에 이모심을 책봉하여 남조왕(南詔王)으로 삼았다. 사부낭중 원자로 하여금 지절(持節)을 갖고 이를 맡도록 하고, 성도소윤 방기를 부사로, 최좌시를 판관으로 삼았다. 구문진이 선위사(宣慰使)를 맡고, 유유암이 판관이 되었다. 황금인(黃金印)을 내렸는데, ‘정원책남조인(貞元冊南詔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원자가 대화성(大和城)에 이르자, 이모심은 형 몽세라물(蒙細羅勿) 등을 보내어 좋은 말 60필을 이끌고 맞이하게 하였다. 말들은 금으로 만든 굴레와 옥으로 된 굴레장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병사들은 창을 들고 길 양쪽으로 늘어 서 있었다. 이모심은 황금 갑옷에 호피(虎皮)를 걸치고 쌍탁초(雙鐸韒)를 잡고 있었다. 창을 들고 있는 자 1,000 명이 호위하였는데, 큰 코끼리 12마리를 앞에 끌어다 놓았고, 이어서 기병과 보병이 차례로 도열하였다. 이른 아침 책봉을 수여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모심은 관리들을 이끌고 북면(北面)하여 서고, 선위사는 동쪽을 향하여 서니, 책봉하는 사신이 남쪽을 향하여 서서, 책봉을 내리는 조서를 읽었다. 의례를 돕는 자가 이모심을 이끌어 그 자리를 나아가 꿇어 앉아 책인을 받게 하니,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내려준 의복과 의례용품을 받았다. [이모심이] 물러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원과 천보 연간에 증조와 조부가 모두 책봉을 받아 왕작을 이었는데, 이로부터 50년이 되었습니다. 정원황제(貞元皇帝: 당 덕종)께서 상처를 씻고 공을 인정하여 다시 작명(爵名)을 내리시니, 자자손손 영원히 당의 신하가 될 것입니다” 이어서 그 아래에서 커다란 연회를 베풀고 사신들을 접대하면서, 은평탈마두반(銀平脫馬頭盤) 두 개를 들고 와서 원자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천보(天寶)시 선군(先君)이 홍려소경으로 숙위할 때 황제가 내린 것입니다”고 하였다. 또 피리 부는 사람과 노래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모두 머리가 희끗 희끗 하였다. 이들을 원자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들은 선군이 귀국할 때 황제가 내려주신 호부(胡部)와 구자악(龜玆樂)을 연주하는 두 악대(樂隊)였는데, 지금은 다 죽어서 없어지고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았습니다”고 하였다. 술이 돌자 이모심이 앉은 채로 원자 앞에 술잔을 올렸다. 원자가 술잔을 받으며, “남조는 마땅히 조상이 이룬 업적을 깊이 새겨 충성을 다하고, 영원히 서남의 번병(藩屛)이 되어야 할 것으로, 후사에 이르러서도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모심이 절을 올리며 말하기를, “감히 사자께서 명하신 바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원자가 돌아갈 때 다시 청평관 윤보추(尹輔酋) 등 7인을 딸려 보내 천자에게 사례하게 하고, 탁초(鐸鞘: 남조의 끝이 예리한 칼), 낭검(浪劍: 남조의 특산 검), 울인(鬱刃), 생금(生金), 슬슬(瑟瑟), 우황(牛黃), 호박(琥珀), 첨(氎), 방사(紡絲), 코끼리, 무소, 월섬(越睒)의 통윤마(統倫馬)를 바쳤다. 탁초라는 것은 모양이 [부러지고] 남은 칼날[殘刃]과 같은데, 구멍이 있어서 옆으로 이을 수 있다. 여수(麗水)에서 나며 금으로 장식하였는데, 내려치면 뚫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족 사람들이 특별히 보배로 여기는데, 달마다 희생의 피를 바쳐 제사지낸다. 울인은 주조할 때 독약을 함께 섞어 단련하는데, 이를 만들 때 별처럼 빛이 나게 되는데, 무릇 10년은 걸려야 완성된다. 말의 피로 담금질하고 단단한 무소뿔로 창 머리를 장식하는데, 사람을 찌르면 즉사한다. 낭인(浪人)이 주조하는 까닭에 낭검(浪劍)이라 이름하였는데, 왕이 패용하는 검은 7대를 전하여 온 것이다. | 明年夏六月,冊異牟尋為南詔王。以祠部郎中袁滋持節領使,成都少尹龐頎副之,崔佐時為判官;俱文珍為宣慰使,劉幽巖為判官。賜黃金印,文曰「貞元冊南詔印」。滋至大和城,異牟尋遣兄蒙細羅勿等以良馬六十迎之,金鍐玉珂,兵振鐸夾路陳。異牟尋金甲,蒙虎皮,執雙鐸韒。執矛千人衞,大象十二引于前,騎軍、徒軍以次列。詰旦,授冊,異牟尋率官屬北面立,宣慰使東向,冊使南向,乃讀詔冊。相者引異牟尋去位,跽受冊印,稽首再拜;又受賜服備物,退曰:「開元、天寶中,曾祖及祖皆蒙冊襲王,自此五十年。貞元皇帝洗痕錄功,復賜爵命,子子孫孫永為唐臣。」因大會其下,享使者,出銀平脫馬頭盤二,謂滋曰:「此天寶時先君以鴻臚少卿宿衞,皇帝所賜也。」有笛工、歌女,皆垂白,示滋曰:「此先君歸國時,皇帝賜胡部、龜茲音聲二列,今喪亡略盡,唯二人故在。」酒行,異牟尋坐,奉觴滋前,滋受觴曰:「南詔當深思祖考成業,抱忠竭誠,永為西南藩屏,使後嗣有以不絕也。」異牟尋拜曰:「敢不承使者所命。」滋還,復遣清平官尹輔酋等七人謝天子,獻鐸鞘、浪劍、鬱刃、生金、瑟瑟、牛黃、虎珀、氎、紡絲、象、犀、越睒統倫馬。鐸鞘者,狀如殘刃,有孔傍達,出麗水,飾以金,所擊無不洞,夷人尤寶,月以血祭之。鬱刃,鑄時以毒藥幷冶,取迎躍如星者,凡十年乃成,淬以馬血,以金犀飾鐔首,傷人即死。浪人所鑄,故亦名浪劍,王所佩者,傳七世矣。 | 21) 이모심이 토번을 공격하여 다시 곤명(昆明城: 지금의 사천성 염원현)을 취하니, 염지(鹽池)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시만(施蠻)과 순만(順蠻)을 격파하고 그 왕들을 모두 사로잡아 백애성(白厓城)에 가두었다. 이어서 마사만(麽些蠻)을 평정하고, 곤산서찬(昆山西爨)의 옛땅을 예속시켰으며, 망만(茫蠻)을 격파하고, 농동만(弄棟蠻)과 한상만(漢裳蠻)을 탈취하여 운남 동북일대를 다 장악하였다. | 異牟尋攻吐蕃,復取昆明城以食鹽池。又破施蠻、順蠻,並虜其王,置白厓城;因定磨些蠻,隸昆山西爨故地;破茫蠻,掠弄棟蠻、漢裳蠻,以實雲南東北。 | 22) 시만(施蠻)은 철교 서북에 위치하였는데, 대시섬(大施睒)과 염심섬(斂尋睒: 운남성 유서속속족자치현 경내)에 거주하였다. 남자는 비단옷을 입고, 여자는 머리카락을 나누어 이마 선을 일직선으로 하여 넘긴 다음 한 갈래로 묶어 뒤로 늘어뜨린다. 그리고 맨발에 가죽옷을 입는다. | 施蠻者,在鐵橋西北,居大施睒、斂尋睒。男子衣繒布;女分髮直額,為一髻垂後,跣而衣皮。 | 23) 순만(順蠻)은 본래 검천(劍川: 운남성 검천현 남쪽 14리 하등)과 공천(共川)지역에서 시만(施蠻)과 잡거하였다. 미라피(咩羅皮)와 택라망(鐸羅望)이 등천(邆川)과 낭궁(浪穹)을 잃은 뒤에 검(劍)과 공(共)의 땅을 빼앗자, 이 때문에 철교 지역으로 옮겨갔다. 검섬(劍睒) 서북 400리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검강(劍羌)이라 불렀다. | 順蠻本與施蠻雜居劍、共諸川。咩羅皮、鐸羅望既失邆川、浪穹,奪劍、共地,由是徙鐵橋,在劍睒西北四百里,號劍羌。 | 24) 마만(磨蠻)과 사만(些蠻)은 여만(施蠻) 순만(順蠻)과 더불어 모두 오종만(烏蠻種)이다. 철교(鐵橋) 대파(大婆: 운남성 화녕현 통홍전향의 대파촌), 소파(小婆) 삼탐람(三探覽: 운남성 영랑이족자치현 북 120리 영녕성), 곤지(昆池) 등의 지역에 거주한다. 그 땅에는 소와 양이 많고, 풍습이 씻지 않으며, 남녀가 모두 가죽옷을 입고, 그 풍속이 음주가무를 좋아한다. | 磨蠻、些蠻與施、順二蠻皆烏蠻種,居鐵橋、大婆、小婆、三探覽、昆池等川。土多牛羊, 俗不頮澤,男女衣皮,俗好飲酒歌舞。 | 25) 망만(茫蠻)은 본디 관남종(關南種)이다. ‘망(茫)’은 그 군주의 이름이다. 혹 망조(茫詔)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창(永昌)의 남쪽에는 망천연(茫天連) 망토호(茫吐薅) 대섬(大睒) 망창(茫昌) 망자(茫鮓) 망시(茫施)가 있는데, 대체로 모두 같은 종이다. 높은 건물을 짓고 살지만 성곽은 없다. 혹 이빨에 옻칠을 하기도 하고 금칠을 하기도 한다. [남자는] 파란색 베로 만든 짧은 바지를 입는데, 정강이가 다 드러난다. 비단으로 허리를 감는데 그 나머지는 내어서 뒤로 늘어뜨려 장식을 삼는다. 부인은 오색 파라농(婆羅籠)을 입는다. 코끼리는 흙빛이 나는 것이 소와 같은데, 길들여서 경작에 사용한다. | 茫蠻本關南種,茫,其君號也,或呼茫詔。永昌之南有茫天連、茫吐薅、大睒、茫昌、茫鮓、茫施,大抵皆其種。樓居,無城郭。或漆齒,或金齒。衣青布短袴,露骭,以繒布繚腰,出其餘垂後為飾。婦人披五色娑羅籠。象纔如牛,養以耕。 | 26) 농동만(弄棟蠻)은 백만종(白蠻種)이다. 그 부족은 본디 몽동현(弄棟縣)의 변경지대에서 거주하였는데, 오래 전에 포주(褒州: 운남성 대요현 동남 54리 계목소촌)가 되었고, 그 수령이 자사(刺史)가 되었다. [수령이] 실수로 그 참군(參軍)을 죽이게 되자, 부족을 이끌고 북으로 달아났다. 후에는 마사강(磨些江: 운남성 유서률속족자치현에서 사천성 반지화시까지의 사이를 흐른다) 옆에 흩어져 살았다. 그 까닭에 검천(劍川)과 공천(共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 弄棟蠻,白蠻種也。其部本居弄棟縣鄙地,昔為褒州,有首領為刺史,誤殺其參軍,挈族北走,後散居磨些江側,故劍、共諸川亦有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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