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93, 구당서 남조전- 1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5. 구당서 남조전 ※ 15. 구당서 남조전의 출처: 1) 번역문: 동북아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舊唐書 卷197/ 남만 서남만열전(南蠻· 西南蠻 列傳) 第147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舊唐書/ 列傳/ 卷一百九十七/ 남만 서남만(南蠻· 西南蠻)/ 남조만(南詔蠻) 15.구당서 남조전(권197 남만, 서남만열전 중 남조전) 번 역 문 | 원 문 | 1) 남조만(南詔蠻)은 본디 오만(烏蠻)의 별종이며, 성(姓)은 몽씨(蒙氏)이다. 만(蠻)은 왕(王)을 ‘조(詔)’라고 한다. 스스로 애뢰(哀牢)의 후예라 말하며, 대대로 몽사주(蒙舍州)에 거하며 거수(渠帥)가 되었는데, 한대(漢代) 영창(永昌) 옛 군(郡)의 동쪽, 요주(姚州)의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전에 거수가 여섯 있었는데, 스스로 ‘육조(六詔)’라 칭하였으며, 병력이 서로 엇비슷하고, 각기 군장(君長)이 있어 서로 통령하지 못하였다. 촉한 시에 제갈량이 정벌하여, 모두 신복(臣服)하였다. 국초(國初)에 몽사룡이 있었고, 가독방을 낳았다. 가독방은 세노라를 낳았으며, [세노라는] [당] 고종 시에 내조하였다. 세노라는 나성을 낳았으며, [나성은] [측천]무후(武后) 시에 내조하였다. [그 때] 그 처(妻)가 바야흐로 임신 중이었다. 나성이 요주(姚州)에 이르렀을 때,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게 아들이 생겼으니, 당나라 땅에서 죽어도 괜찮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아들의 이름은 성라피라고 하였다. 나성이 경사(장안)에 이르니, 금포(錦袍)와 금대(金帶)를 하사하여, 귀국하도록 하였다. | 南詔蠻,本烏蠻之別種也,姓蒙氏。蠻謂王為「詔」,自言哀牢之後,代居蒙舍州為渠帥,在漢永昌故郡東,姚州之西。其先渠帥有六,自號「六詔」,兵力相埒,各有君長,無統帥。蜀時為諸葛亮所征,皆臣服之。國初有蒙舍龍,生迦獨龐。迦獨生細奴邏,高宗時來朝。細奴邏生邏盛,武后時來朝。其妻方娠,邏盛次姚州,聞妻生子,曰:「吾且有子,死於唐地足矣。」子名曰盛邏皮。邏盛至京師,賜錦袍金帶歸國。 | 2) [현종] 개원 연간(713~741) 초에 나성(邏盛)이 죽고, 아들 성라피가 섰다. 성라피가 죽고, 아들 피라각이 섰다. [당 현종 개원] 26년(738)에 조서를 내려 특진에 제수하고, 월국공(越國公)에 봉하였으며, 이름을 하사하여 귀의(歸義)라고 하였다. 그 뒤에 이하만(洱河蠻)을 격파한 공으로 운남왕(雲南王)에 책봉되었다. 귀의는 점차 강성하고, 나머지 5조(五詔)는 점차 약해졌다. 이에 앞서 검남절도사 왕욱이 귀의(歸義)로부터 뇌물을 받고, 육조(六詔)를 통합하여 일조(一詔)로 만들도록 상주하였다. [몽(蒙)]귀의가 이미 5조를 병합하고, 군만을 복속하고, 토번(吐蕃)의 군대를 격파하자, 날로 교만이 커졌다. 매번 입근(入覲)할 때마다 조정(朝廷) 또한 남다른 예우를 더하였다. [개원] 27년(739)에 대화성으로 사거(徙居)하였다. 천보(天寶) 4년(745)에 귀의가 손자인 봉가이를 보내 내조하였는데, 홍려경에 제수하였으며, 귀국할 때는 은사(恩賜)가 매우 두터웠다. [몽]귀의의 뜻과 야망 또한 높아졌다. 당시 검남절도사 장구겸경이 사자를 보내 운남에 이르렀는데, 귀의(歸義)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으나 서로 잘 맞지 않았다. 귀의가 늘 [원망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 開元初,邏盛死,子盛邏皮立。盛邏皮死,子皮邏閣立。二十六年,詔授特進,封越國公,賜名曰歸義。其後破洱河蠻,以功策授雲南王。歸義漸強盛,餘五詔浸弱。先是,劍南節度使王昱受歸義賂,奏六詔合為一詔。歸義既併五詔,服羣蠻,破吐蕃之眾兵,日以驕大。每入覲,朝廷亦加禮異。二十七年,徙居大和城。天寶四載,歸義遣孫鳳迦異來朝,授鴻臚卿,歸國,恩賜甚厚,歸義意望亦高。時劍南節度使章仇兼瓊遣使至雲南,與歸義言語不相得,歸義常銜之。 | 3) [현종 천보] 7년(748)에 [몽]귀의가 죽자, 조서를 내려 그 아들 각라봉을 세워 운남왕을 습봉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우중통이 검남절도사가 되고, 장건타가 운남태수가 되었다. (선우)중통은 속이 좁고 급한 데다 지모도 적었고, (장)건타는 속이기를 잘하여, [남조를] 예(禮)로 대하지 않았다. 구례(舊例)에 따라, 남조(南詔)는 늘 그 처자와 더불어 도독을 알현하였는데, [장]건타가 그들과 시종 사통하였다. [장건타가] 요구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각라봉이 대부분 응하지 않자, 장건타가 사람을 보내 꾸짖어 모욕하고, 이어서 은밀히 각라봉의 죄악을 상주하였다. 각라봉이 분하고 원통하여 군대를 일으켜 이반하였다. [장]건타를 공격, 포위하여 죽였는데, 때는 천보(天寶) 9년(750)이었다. 다음해에 [선우]중통이 군대를 이끌고 융주(戎州)와 수주(嶲州)로 나왔다. 각라봉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는데, 운남부(雲南府)의 녹사참군 강여지와 함께 와서 그 노략한 것을 다시 돌려주겠다고 청하면서, 또 말하기를, “토번의 대군이 국경을 압박하고 있으니,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마땅히 토번으로 귀부할 것이며, [그러면] 운남의 땅은 [더 이상] 당의 소유가 아니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우]중통이 허락하지 않고, 그 사자를 가둔 뒤, 군대를 진격시켜 대화성(大和城)에 육박하였으나, 남조(南詔)에게 패하였다. 이로부터 각라봉은 북쪽으로 토번에 신속하였으며, 토번은 각라봉을 찬보종(贊普鍾)으로 삼고, 동제(東帝)라 호칭하여 금인(金印)을 지급하였다. 만(蠻)은 제(弟)를 일러 ‘종(鍾)’이라고 한다. 때는 천보 11년(752)이었다. (천보)12년(753년)에 검남절도사 양국충이 국정(國政)을 장악하였는데, 이에 천하의 군대를 징발하도록 상주하였다. [검남절도] 유후(留後)이자 시어사 이복에게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군량을 나르는 자는 제외한 숫자이다. 바다를 건너다가 장기(瘴氣)로 죽는 자가 길에 서로 이어졌고, 천하가 비로소 소란하여 그것을 괴로워하였다. [이]복도 대화성(大和城)의 북쪽에서 패하였고, 죽은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었다. 마침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각라봉은 그 틈을 타서 수주(嶲州)와 회동군(會同軍)을 공격 함락시켰고, 서쪽으로 또 심전만(尋傳蠻)을 항복시켰다. | 七年,歸義卒,詔立子閣羅鳳襲雲南王。無何,鮮于仲通為劍南節度使,張虔陀為雲南太守。仲通褊急寡謀,虔陀矯詐,待之不以禮。舊事,南詔常與其妻子謁見都督,虔陀皆私之。有所徵求,閣羅鳳多不應,虔陀遣人罵辱之,仍密奏其罪惡。閣羅鳳忿怨,因發兵反,攻圍虔陀,殺之,時天寶九年也。明年,仲通率兵出戎、嶲州。閣羅鳳遣使謝罪,仍與雲南錄事參軍姜如芝俱來,請還其所虜掠,且言:「吐蕃大兵壓境,若不許,當歸命吐蕃,雲南之地,非唐所有也。」仲通不許,囚其使,進兵逼大和城,為南詔所敗。自是閣羅鳳北臣吐蕃,吐蕃令閣羅鳳為贊普鍾,號曰東帝,給以金印。蠻謂弟為「鍾」。時天寶十一年也。十二年,劍南節度使楊國忠執國政,仍奏徵天下兵,俾留後、侍御史李宓將十餘萬,輦餉者在外,涉海瘴死者相屬於路,天下始騷然苦之。宓復敗於大和城北,死者十八、九。會安祿山反,閣羅鳳乘釁攻陷嶲州及會同軍,西復降尋傳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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