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지 동이전 부여전(위략) 2.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 3. 구삼국사 동명왕 본기 4. 위서 고구려전 5. 논형, 부여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 | 삼국지 부여전(위략) | 부여(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는데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蛙] <개구리는 또는 달팽이[蝸]라고도 한다.>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다.” 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느님이 내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여 오곡(五穀)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는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때에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나는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이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 때에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수(鴨淥水)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없이 남을 좇았다고 책망하여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 하게 하였습니다.” 금와는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에 비취어 [유화는]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좇아와 비쳤다. 그래서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왕[금와]은 알을 버려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후에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은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기이하였다.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서 항상 주몽과 더불어 놀았는데 그 기예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였다.“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사람됨이 용맹스럽습니다. 만약 일찍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없애버리십시오!”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날랜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가 또 죽이려고 꾀하자, 주몽의 어머니가 이것을 눈치채고 [주몽에게] 일렀다.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일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함께 갔다. 엄시수(淹㴲水)<또는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한다. 지금[고려]의 압록강(鴨淥江) 동북쪽에 있다.>에 다다라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추격병에게 잡히게 될 것이 두려워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하는 기마병이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위서(魏書)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삼베옷[麻衣]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 옷[衲衣]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네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삼베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였고, 중 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고, 마름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고 대답하였으나, 성들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을 주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였다.“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위서(魏書)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그로 말미암아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몽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다. 이 해는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이었다. | 옛 기록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 북방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王)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王)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한 크기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왕(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고,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王)은 천제(天帝)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동명(東明)이 활을 잘 쏘자, 왕(王)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東明)은 달아나서 남쪽의 시엄수(施掩水)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東明)이 [그것을 딛고] 물을 건너간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東明)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여 왕(王)이 되었다. |
구삼국사 동명왕 본기 | 삼국지 부여전(위략) | 왕이 천제 아들의 비(妃)인 것을 알고 별궁(別宮)에 두었더니 그 여자의 품안에 해가 비치자 이어 임신하여 신작(神雀) 4년 계해년 여름 4월에 주몽(朱蒙)을 낳았는데 우는 소리가 매우 크고 골상이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처음 낳을 때에 좌편 겨드랑이로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되[五升]들이 만하였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이 새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하고, 사람을 시켜 마구간에 두었더니 여러 말들이 밟지 않고, 깊은 산에 버렸더니 모든 짐승이 호위하고 구름 끼고 음침한 날에도 알 위에 항상 햇빛이 있었다. 왕이 알을 도로 가져다가 어미에게 보내어 기르게 하였더니, 알이 마침내 갈라져서 한 사내 아이를 얻었는데 낳은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언어가 모두 정확하였다. 어머니에게,“파리들이 눈을 빨아서 잘 수가 없으니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오”하였다. 그 어머니가 댓가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 스스로 물레 위의 파리를 쏘는데 화살을 쏘는 족족 맞혔다. 부여(扶餘)에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들 한다. 나이가 많아지자 재능이 다 갖추어졌다. 금와왕은 아들 일곱이 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며 사냥하였다. 왕의 아들과 따르는 사람 40여 인이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는데 주몽은 사슴을 퍽 많이 쏘아 잡았다. 왕자가 시기하여 주몽을 붙잡아 나무에 묶어 매고 사슴을 빼앗았는데, 주몽이 나무를 뽑아 버리고 갔다. 태자(太子) 대소(帶素)가 왕에게,“주몽이란 자는 신통하고 용맹한 장사여서 눈초리가 비상하니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여 그 뜻을 시험하였다. 주몽이 마음으로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 “나는 천제의 손자인데 남을 위하여 말을 기르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남쪽 땅에 가서 나라를 세우려 하나 어머니가 계셔서 마음대로 못합니다.”하였다. 그 어머니가,“이것은 내가 밤낮으로 고심하던 일이다. 내가 들으니 장사가 먼길을 가려면 반드시 준마가 있어야 한다. 내가 말을 고를 수 있다.”하고, 드디어 목마장으로 가서 긴 채찍으로 어지럽게 때리니 여러 말이 모두 놀라 달아나는데 한 마리 붉은 말이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넘었다. 주몽은 이 말이 준마임을 알고 가만히 바늘을 혀 밑에 꽂아 놓았다. 그 말은 혀가 아파서 물과 풀을 먹지 못하여 심히 야위었다. 왕이 목마장을 순시하며 여러 말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서 인하여 야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이 이 말을 얻고 나서 그 바늘을 뽑고 도로 먹였다 한다. 몰래 오이(烏伊)·마리(馬離)·협보(陜父) 등 3인과 맺고 남쪽으로 가서 엄체수(淹滯)에 이르렀는데, 건너려 하나 배는 없고 쫓는 군사가 곧 이를 것을 두려워하여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개연히 탄식하기를,“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황천과 후토(后土)는 나 고자(孤子)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주소서.”하고, 말을 마치고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가 나와 다리를 이루어 주몽이 건넜는데 한참 뒤에 쫓는 군사가 이르렀다. 쫓아온 군사가 하수에 이르니 고기와 자라가 이룬 다리가 곧 허물어져 이미 다리에 오른 자는 모두 빠져 죽었다. 주몽이 이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어미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하고 오곡 종자를 싸 주어 보내었다. 주몽이 살아서 이별하는 마음이 애절하여 보리 종자를 잊어버리고 왔다. 주몽이 큰 나무 밑에서 쉬는데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왔다. 주몽이,“아마도 신모(神母)께서 보리 종자를 보내신 것이리라.”하고, 활을 쏘아 한 화살에 모두 떨어뜨려 목구멍을 벌려 보리 종자를 얻고 나서 물을 뿜으니 비둘기가 다시 소생하여 날아갔다. 왕이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단군고기) 비수(沸水) 위에 집을 짓고,(단군고기)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인하여 고(高)로써 성을 삼고,(단군고기) 왕이 스스로 띠자리 위에 앉아서 대강 임금과 신하의 위치를 정하였다. | 옛 기록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 북방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註029] 그 왕(王)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王)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한 크기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왕(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고,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王)은 천제(天帝)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동명(東明)이 활을 잘 쏘자, 왕(王)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東明)은 달아나서 남쪽의 시엄수(施掩水)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東明)이 [그것을 딛고] 물을 건너간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東明)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여 왕(王)이 되었다. |
------------------------------------------------------------------------------ 위서에는 부여전이 없음. 위서((魏書) 고구려전 | 삼국지 부여전(위략) |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로서 부여왕(夫餘王)에게 [잡혀] 방에 갇혀 있던 중, 햇빛이 비치는 것을 몸을 돌려 피하였으나 햇빛이 다시 따라와 비추었다. 얼마 후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升)들이 만하였다. 부여왕이 그 알을 개에게 주었으나 개가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다 버렸으나 소나 말들이 피해 다녔다. 뒤에 들판에 버려 두었더니 뭇새가 깃털로 그 알을 감쌌다. 부여왕은 그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게 되자, 결국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그 어머니가 다른 물건으로 이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사내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가 성장하여 자(字)를 주몽(朱蒙)이라고 하니, 그 나라 속언(俗言)에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所生)이 아니기 때문에 장차 딴 뜻을 품을 것이라고 하여 그를 없애 버리자고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은 말마다 남모르게 시험하여 좋은 말과 나쁜 말이 있음을 알고, 준마는 먹이를 줄여 마르게 하고 굼뜬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뒤 사냥할 때 주몽에게는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한 마리를 잡는데] 화살 하나로 한정시켰으나, 주몽이 비록 화살은 적었지만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 모의를 꾸미자, 주몽의 어머니가 알아차리고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너를 해치려 하니, 너 같은 재주와 경략을 가진 사람은 아무데고 멀리 떠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주몽은 이에 오인(烏引) 오위(烏違) 등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중도에서 큰 강을 하나 만났는데, 건너려 하여도 다리는 없고, 부여 사람들의 추격은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이 강에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길에 추격하는 군사가 바짝 쫓아오니, 어떻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자, 이 때에 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 올라와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건넌 뒤 고기와 자라는 금방 흩어져버려 추격하던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은 마침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무명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부들로 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주몽과 함께 홀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인하여 성을 고씨(高氏)라 하였다. | 옛 기록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 북방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王)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王)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한 크기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왕(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고,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王)은 천제(天帝)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동명(東明)이 활을 잘 쏘자, 왕(王)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東明)은 달아나서 남쪽의 시엄수(施掩水)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東明)이 [그것을 딛고] 물을 건너간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東明)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여 왕(王)이 되었다. |
논형에 실려있는 동명왕 이야기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 부여(夫餘)를 세운 동명왕(東明王)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구리(高句麗)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므로 학자들은 고구리 (高句麗) 건국신화(建國神話)가 부여 건국신화에서 그 내용을 따온 것으로 추정한다. 다음은 <논형(論衡)> 권이(卷二) 길험편(吉驗篇)에 기록되어 있는 동명왕 이야기다.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임금을 모시던 무수리(侍婢)가 임신했다. 王欲殺之 임금이 무수리를 죽이려고 하니 婢對曰 무수리가 사뢰되 有氣大如雞子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從天而下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我故有娠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後産子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捐於豬溷中 돼지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버리니 豬以口氣噓之不死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復徙置馬欄中 다시 마구간(馬欄)으로 옮겨(徙置) 欲使馬借殺之 말이 (임금)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馬複以口氣噓之不死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王疑以爲天子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令其母收取奴畜之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名東明 동명이라 이름 짓고 令牧牛馬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東明善射 동명은 활을 잘 쐈다. 王恐奪其國也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뺏앗길까 두려웠다. 欲殺之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東明走 동명이 달아났다. 南至掩水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以弓擊水 활로 물을 치니 魚鱉浮爲橋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東明得渡 동명이 건너자 魚鱉解散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追兵不得渡 추격병들(追兵)은 건너지 못했다. 因都王夫餘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서울을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故北夷有夫余國焉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東明之母初妊時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見氣從天下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及生棄之 동명을 낳아 키웠다. 豬馬以氣籲之而生之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長大 몸이 장대(長大)하므로 王欲殺之 임금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以弓擊水 활로 물을 치니 魚鱉爲橋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天命不當死 하늘의 운명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故有豬馬之救 돼지와 말이 (동명을) 구해주었다. 命當都王夫餘 부여에 서울을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故有魚鱉爲橋之助也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동명을) 도와주었다. <논형 권이 길험편에서> [한자 풀이] 橐 : [탁] 전대(주머니), 풀무 捐 : [연] 버리다, 주다, 기부하다 豬 : [저] 돼지 溷 : [혼] 어지럽다. 흐리다, 더럽다, 뒷간 噓 : [허] 불다 徙 : [사] 옮기다. 넘기다. 귀양보내다 欄 : [난] 난간, 울간 借 : [차] 빌다, 빌리다 奴畜 : 노비처럼 키우다 掩 : [엄] 가리다, 숨기다 籲 : [유] 부르다 "王疑以爲天子"에서 <疑>는 원래 "의심하다"는 뜻이다. <疑>를 "의심하다"로 풀이하면, 위 글월은 "하늘의 아들인 것을 의심하다", 즉 "원래 하늘 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그게 의심스럽다"는 뜻이 되어 의미가 180도 달라진다. <疑>를 영어의 "wonder"로 풀이하면 뜻이 명확해진다. <wonder>는 "~이 아닐까 긴가민가하다"는 뜻이므로 위 글월은 "임금이 처음으로 '동명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뜻이 된다. <엄수(掩水)>의 <엄(掩)>은 우리말에서 "크다"를 뜻하는 "엄엄하다"의 "엄"을 음차(音借) 한 글자라고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에서 추모왕(鄒牟王)이 건넌 강은 엄리대수(奄利大水)이다. 지금의 아무르강(黑龍江)이나 송화강(松花江)이 아닐까? 지도 앞에 앉아 상상(想像)의 나래를 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왕충(王充)은 누구인가? 왕충(王充)은 서기(西紀) 27년부터 97년까지 살았던 후한(後漢)의 사상가(思想家)다. 자(字)는 중임(仲任)이고 회계(會稽) 상우(上虞) 사람이다. 왕충에 대한 이야기는 논형(論衡)과 후한서(後漢書)에 각각 적혀 있다. 논형(論衡) 권삼십(券三十) 자기편(自紀篇)은 왕충이 자기자신에 대해 적은 글이다. 후한서(後漢書) 제49권 왕충(王充), 왕부(王符), 중장통(仲長統) 열전(列傳)에도 왕충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왕충은 후한(後漢)이 가장 번성(繁盛)했던 시기(時期)와 바야흐로 쇠퇴기(衰退期)에 접어 드는 시기(時期)를 모두 살았다. 유방(劉邦)이 기원전 202년에 세운 한(漢)나라는 서기 9년에 왕망(王莽)에게 망한다.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나라는 왕망의 죽음과 함께 서기 23년에 멸망한다. 한(漢) 종친(宗親)이던 유수(劉秀)는 서기 25년에 후한(後漢)을 세우고 다시 중국을 통일 한다. 유수 이후 명제(明帝)와 장제(章帝)를 거치면서 후한(後漢)은 최고 전성기를 누리지만 제4 대 화제(和帝) 때부터 외척(外戚)과 환관(宦官)의 발호(跋扈)로 다시 쇠퇴하기 시작한다. 광무제(光武帝) : 25년-57년 명제(明帝) : 57년-75년 장제(章帝) : 75년-88년 화제(和帝) : 88년-105년 왕충(王充)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았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책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늘 낙양(洛陽) 저자거리에 있는 책방에 가서 책을 봤는데, 기억력이 좋아 한 번 보기만 해도 그 내용을 줄줄 외었다고 한다. 나중에 반표(班彪)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 아들 반고(班固)와는 동무 사이였다. 반고(班固)는 한서(漢書)의 저자(著者)다. 왕충 사상(思想)의 특징(特徵)은 도참사상(圖讖思想)이 유행했던 시대상(時代相)과는 달리 객곽적(客觀的)이고도 합리적(合理的)인 관점(觀點)에서 사물(事物)을 바라보았다는 점이 다.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관념(觀念)을 부정했고, 귀신(鬼神)과 신령 (神靈)의 존재(存在)도 부정했다. 왕충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체계(思想體系)를 가졌다고 하지만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왕충이나 왕충이 비판한 사람이나 다 "도토리 키재기"다. 그는 또 기존 권위(權威)에 굴하지 않는 성격을 지녀 비록 공자나 맹자라 하더라도 잘못이 있으면 거침없이 비판하였다. 관직(官職)에도 오른 적이 있지만 타협(妥協)을 모르고 논쟁(論爭)하기 좋아하는 성격(性格) 때문에 오래 있지는 못했다. <기속절의(譏俗節義)>, <정무(政務)>, <논형(論衡)>, <양성(養性)> 등의 여러 책을 썼으나 <논형(論衡)>만 빼고는 모두 실전(失傳)되었다. 논형(論衡) 논형(論衡)은 모두 30권 8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명왕(東明王) 이야기는 제2권 길험편(吉驗篇)에 적혀 있다. 논형(論衡) 제2권은 길험편(吉驗篇) 외에도 행우편(幸偶篇), 명의편(命義篇), 무형편(無 篇), 솔성편(率性篇)이 더 있다. 논형(論衡)은 무슨 뜻일까?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면 영어로 "Critical Essays"라고 번역되어 있다. 논형(論衡)의 논(論)은 "논(論)한다"는 뜻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심도있게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형(衡)은 "저울"을 가리킨다. 그런데 논형(論衡)의 형(衡)을 "저울"로 풀이하면 "저울을 논한다"는 뜻이 되어 뭔가 부자연스럽다. 야후 대만의 사전 서비스에서 형(衡)을 찾아보니 "Judge"라고 풀이해 놓았다. 저울의 기능이 물건의 무게를 재는 것인데, 이 뜻이 전용(轉用)되어 "사물을 판단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이 두 글자를 더하면 논형(論衡)은 "사물을 논하고 그 가치(價値)를 판단한다"는 뜻이 된다. 대만(臺灣)에서는 지금도 이 말을 쓰고 있다. 익숙한 우리말로 바꾼다면 "논설(論說)"이 적당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