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76, 구당서 회홀전-3)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3. 구당서 회홀전 ※ 13. 구당서 회홀전(권195) 출처: 1) 번역문: 동북아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舊唐書 卷195/ 회홀열전(迴紇列傳) 第145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舊唐書/ 列傳/ 卷一百九十五/迴紇 번 역 문 | 원 문 | 12) 건원 2년(759)에 회흘 골철 특근 등이 무리를 이끌고 곽자의와 아홉 절도사와 함께 상주성 아래에서 전투를 했는데 불리했다. 3월 임자일에 회흘 왕자 골철 특근과 재상 제덕 등 15명이 상주에서 서경으로 도망쳐오자 숙종이 자신전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고, 등급에 따라 물자를 상으로 주었다. 그 달 경인일에 회흘 특근이 진영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자 황제가 자신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고 물자를 등급에 따라 내려주었다. 을미일에 회흘 왕자에게 새롭게 좌우림대장군 원외치를 제수하며 골철 특근을 은청광록대부(종 3품) 홍려경원외치로 삼았다. | 乾元二年,迴紇骨啜特勤等率眾從郭子儀與九節度於相州城下戰,不利。三月壬子,迴紇王子骨啜特勤及宰相帝德等十五人自相州奔于西京,肅宗宴之于紫宸殿,賞物有差。其月庚寅,迴紇特勤辭還行營,上宴之于紫宸殿,賜物有差。乙未,以迴紇王子新除左羽林軍大將軍員外置骨啜特勤為銀青光祿大夫、鴻臚卿員外置。 | 13) 여름 4월에 회흘 비가궐가한(제2대 가한)이 죽었다. 장자 엽호가 먼저 죽임을 당해 바로 그의 작은 아들인 등리가한(제3대 가한)이 즉위해 그 아내를 가돈으로 삼았다. 6월 병오일에 좌금오위장군 이통을 시홍려경(試鴻臚卿) 섭어사중승으로 삼아 조제회흘사(弔祭迴紇使)를 맡게 했다. 비가궐가한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의 관리와 도독 등이 영국공주를 순장시키려고 하자 공주가 말했다. “우리 중국의 법도대로라면 남편이 죽으면 상복을 입고 아침과 저녁으로 곡을 하다가 삼년이 지나면 상복을 벗으면 된다. 지금 회흘에 시집을 왔으나 반드시 중국의 예법에 따라야 할 것이다. 만약 지금 이 나라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면 어찌 만 리까지 결혼을 하러 왔겠느냐?” 그럼에도 공주 역시 회흘의 법도에 따라 얼굴을 [칼로] 그으며 크게 울었는데, 마침 자식이 없어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가을 8월에 영국공주가 회흘에서 돌아오자 [숙종이] 조칙을 내려 백관들이 명봉문 밖에서 맞이하게 했다. 상원 원년(760) 9월 기축일에 회흘 구성가한(九姓可汗: 9姓은 일반적으로 회흘 9성의 약칭)이 대신 구륙막달간 등을 사신으로 보내 조정에 들어와 표를 받들고 머물렀다. 을묘일에 회흘 사신 20명이 연영전에서 [숙종을] 알현하자 등급에 따라 물자를 내려주었다. 11월 무진일에 회흘 사신 연지가라 등 10명이 연영전에서 알현을 하자 [숙종이] 등급에 따라 물자를 주었다. | 夏四月,迴紇毗伽闕可汗死。長子葉護先被殺,乃立其少子登里可汗,其妻為可敦。六月丙午,以左金吾衞將軍李通為試鴻臚卿、攝御史中丞,充弔祭迴紇使。毗伽闕可汗初死,其牙官、都督等欲以寧國公主殉葬,公主曰:「我中國法,壻死,即持喪,朝夕哭臨,三年行服。今迴紇娶婦,須慕中國禮。若今依本國法,何須萬里結婚。」然公主亦依迴紇法,剺面大哭,竟以無子得歸。秋八月,寧國公主自迴紇還,詔百官於明鳳門外迎之。上元元年九月己丑,迴紇九姓可汗使大臣俱陸莫達干等入朝奉表起居。乙卯,迴紇使二十人於延英殿通謁,賜物有差。十一月戊辰,迴紇使延支伽羅等十人於延英殿謁見,賜物有差。 | 14) 보응 원년(762) 대종(代宗: 광평왕-8대)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사조의(史朝義)가 여전히 하락(河洛: 황하와 낙수가 합류하는 지역과 그 부근을 땅)에 있었기 때문에 중사(中使: 환관) 유청담을 병력 동원을 위해 회흘에 보내면서 다시 과거의 우호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 해 가을에 [유]청담이 회흘의 아정에 들어갔는데, 회흘이 이미 사조의의 꼬임에 빠져 당나라의 천자가 붕어해 나라가 어지럽고 주인이 없으니 군대를 일으켜 와서 나라의 창고를 거두어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가한이 이에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니 이미 팔월이었다. [유]청담이 조칙 담긴 편지를 갖고 오자 가한이 말했다. “나는 당나라에 이미 주인이 없다고 들었는데 어찌 다시 칙서를 갖고 왔는가?” 중사 [유청감]이 대답해 말했다. “우리 당나라 천자께서는 비록 세상을 떠나셨지만 천자를 물려받으신 광평왕께서는 뛰어남과 용맹함을 타고 나셨고, 지난 해 회흘 엽호의 병마와 함께 두 수도[兩京]를 탈환하고 안경서를 격파해 가한과 사귀신 바가 있었습니다. 또한 매년 가한에게 비단을 수만 필이나 주었는데 가한은 어찌 [이런 과거의 일을] 잊어버리셨단 말입니까?” 그러나 회흘이 이미 출병해서 3성(三城: 3受降城 즉, 東수항성, 中수항성, 西수항성을 말한다)의 북쪽에 이르렀는데, 황량한 성에는 지키는 병졸이 없고 주현(州縣)이 모두 비어있는 것을 보고 당조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어 바로 북쪽에 사신을 보내 선우[도호부]의 병마와 식량을 모두 거두어들이며 또한 [유]청담을 크게 욕보였다. [유]청담이 사자를 보내 아뢰어 말했다. “회흘의 등리가한이 나라의 힘을 기울여 몸소 왔는데, 무리가 10만이고 양과 말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경사(京師: 장안)에서 크게 놀랐다. 황제가 전중감 약자앙을 시켜 빨리 달려가 [그들을] 위무하게 했는데, [회흘의 가한 일행은] 이미 태원의 북쪽 흔주(忻州: 지금 산서성 흔주시)의 남쪽에 와있었다. [약]자앙이 몰래 그 장정의 숫자를 헤아려보니 4천 명이고 늙은이와 아이, 그리고 부녀자를 합친 것이 만여 명 정도였으며 전마가 4만 필, 양과 소의 수를 셀 수 없었다. | 寶應元年,代宗初即位,以史朝義尚在河洛,遣中使劉清潭徵兵於迴紇,又修舊好。其秋,清潭入迴紇庭,迴紇已為史朝義所誘,云唐家天子頻有大喪,國亂無主,請發兵來收府庫。可汗乃領眾而南,已八月矣。清潭賫敕書國信至,可汗曰:「我聞唐家已無主,何為更有敕書?」中使對曰:「我唐家天子雖棄萬國,嗣天子廣平王天生英武,往年與迴紇葉護兵馬同收兩京,破安慶緒,與可汗有故。又每年與可汗繒絹數萬匹,可汗豈忘之耶?」然迴紇業已發至三城北,見荒城無戍卒,州縣盡為空壘,有輕唐色,乃遣使北收單于兵馬食糧,又大辱清潭。清潭發使來奏云:「迴紇登里可汗傾國自來,有眾十萬,羊馬不知其數。」京師大駭。上使殿中監藥子昂馳勞之,及於太原北忻州南,子昂密數其丁壯,得四千人,老小婦人相兼萬餘人,戰馬四萬匹,牛羊不紀。 | 15) 먼저 비가궐가한이 아들의 결혼을 청하자 숙종이 복고회은의 딸을 시집보내 주었었다. 그리고 이 [딸]이 가돈이 되어 가한과 함께 와서 [아비인 복고]회은과 [복고]회은의 어머니를 만나기를 청했다. 황제가 [복고]회은에게 분주(汾州)에 가서 태원에서 [회흘 일행을] 만나게 했는데, [복고]회은은 또한 [가한에게] 당나라에 입은 은혜와 신의를 배반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당초에 [가한은] 포관(蒲關: 지금 섬서성 대려현 조읍진 동쪽 황하 서안-西岸)에서 들어가고자 사원(沙苑)으로 가는 길을 취해 동관(潼關: 지금 섬서성 동관현 동북쪽)을 거쳐 동쪽을 향해 갔다가 적을 격파하게 되자 [약]자앙이 [가한에게] 말했다. “나라가 여러 번 역당의 침입을 당해 주현이 텅텅 비어 [물자] 공급을 해주기 어려울 것이나 가한은 실망하지 마십시오. 토문(土門)으로 통하는 길을 취해 들어가는 것은 바로 형[주](邢州: 치소가 지금 하북성 형대시), 명[주](洺州: 하북성 영년현 동남쪽 성관진), 위[주](衛州: 지금 하남성 준현 서남쪽 기문도), 회[주](懷州: 하남성 심양시-沁陽市)를 취하는 것만 못합니다. 적군의 병마가 모두 동경(낙양)에 있으니 가한이 그들의 재물과 비단을 얻으려면 속히 무장하고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최고의 상책입니다.” 가한이 따르지 않았다. 다시 [약자앙이] 말했다. “회주 태행[현](太行縣: 지금 하남성 박애현)을 경유하는 길을 취해 남쪽으로 하음(河陰: 하남성 정주시-鄭州市 서북 70리 떨어진 임장)의 요새에 차지함으로써 바로 적의 목을 누르는 것 또한 상책입니다.” 가한이 또한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약자앙이] 다시 말했다. “섬주(陝州: 하남성 삼문합시 서쪽 섬현) 태양진(太陽津)을 경유하는 길을 취해 태원에 있는 창고의 곡식을 군량으로 삼고 동진해 택로(澤潞: 지금 산서성 장치시), 하남(河南: 치소가 지금 하남성 개봉시), 회정절도사와 같이 공격해 들어가는 것 역시 상책입니다.” 가한이 [이 의견에] 따랐다. [약]자앙이 이로 인해 조정에 들어와 [그동안의 사정을] 아뢰자 황제가 옹왕(雍王: 이후에 덕종으로 즉위) [이]괄(李适)을 병마원수로 삼고 [복고]회은에게는 동중서문하평장사를 더했다. 또한 [약]자앙에게 어사중승을 겸하게 하고, 전에 노부(潞府) 겸 어사중승 위거를 좌우상병마사로 삼고, 중서사인 위소화를 원수판관(元帥判官) 겸 장서기로 삼고, 급사중 이진을 어사중승을 겸하게 해 원수행군사마를 맡게 한 다음 동쪽으로 진군해 섬주의 황하 이북에서 회흘의 등리가한과 만나게 했다. | 先是,毗伽闕可汗請以子婚,肅宗以僕固懷恩女嫁之。及是為可敦,與可汗同來,請懷恩及懷恩母相見。上敕懷恩自汾州見之於太原,懷恩又諫國家恩信不可違背。初欲自蒲關入,取沙苑路,由潼關東向破賊,子昂說之云:「國家頻遭寇逆,州縣虛乏,難為供擬,恐可汗失望。不如取土門路入,直取邢、洺、衞、懷。賊中兵馬盡在東京,可汗收其財帛,束裝南向,最為上策。」可汗不從。又說「取懷州太行路,南據河陰之險,直扼賊之喉,亦上策也。」可汗又不從。又說「取陝州太陽津路,食太原倉粟而東,與澤潞、河南、懷鄭節度同入,亦上策也。」可汗從之。子昂因入奏,上以雍王适為兵馬元帥,加懷恩同中書門下平章事。又以子昂兼御史中丞,與前潞府兼御史中丞魏琚為左右廂兵馬使,以中書舍人韋少華充元帥判官兼掌書記,給事中李進兼御史中丞,充元帥行軍司馬,東會迴紇登里可汗營於陝州黃河北。 | 16) 원수 옹왕이 [약]자앙 등의 수하를 거느리고 [등리가한을] 만났는데, [등리]가한이 옹왕이 천막 앞에서 춤을 추지 않자 예절이 오만하다고 책망했다. [약]자앙이 원수는 황제의 적손이고, 두 황제(현종과 숙종)의 장례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춤을 추는 것은 합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회흘 재상과 차비장군 정힐이 말했다. “당나라 천자와 등리가한이 형제가 되기로 약속했으니 지금 가한은 바로 옹왕의 숙부가 되고, 숙부와 조카 사이에는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인데 어찌 춤을 출 수 없단 말인가?” [약]자앙이 [옹왕이] 상중이기 때문에 [춤추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어렵게 말했다. 또한 대답해 말했다. “원수는 당나라의 태자이고 태자는 저군(儲君)인데 어찌 중국의 저군이 외국 가한 앞에서 춤을 출 수 없단 말입니까?” 서로 오래 버티자 차비[장군]이 마침내 [약]자앙, 이진, [위]소화, 위거 등을 잡아다 각각 채찍으로 백 대를 치자 [위]소화와 [위]거가 채찍에 맞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회흘은 옹]왕이 나이가 어려 일에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본영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복고]회은과 회흘 우살(右殺)을 선봉으로 삼아 여러 절도[사]들과 같이 적을 공격해 격파하자 사조의가 잔당을 이끌고 도망갔다. [이에] 원수 옹왕도 물러나 영보[현](靈寶縣: 하남성 영보시 동북쪽으로 38리 떨어진 곳)으로 돌아갔다. 회흘 [등리]가한이 이어 하양(河陽: 지금 하남성 맹현 서쪽 35리 떨어진 야수진)으로 나아가 진영을 펼친 다음에 수개월 동안 머물렀다. 진영에서 백여 리 떨어진 곳까지 백성들이 약탈당하고 욕을 보아 그 폐해를 감당할 수 없었다. [복고]회은이 군전(軍殿)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러 절도사들이 하북(河北: 황하의 오르도스 지역 이북)의 주현을 회복하자 복고창과 회흘의 무리가 2천여 리를 추격해 평주(平州: 지금 하북성 노룡현 북쪽 반장진 침장 일대) 석성현(石城縣: 지금 하북성 난현-滦縣 서북쪽에 있는 봉자진)에 이르러 [사조의]의 머리를 잘라 걸고 돌아옴으로써 하북이 모두 평정되었다. [복고]회은이 상주로부터 서쪽의 곽구(崞口: 하북성 감단시 서쪽)로 나아가자 가한은 하양에서 북쪽으로 택[주](澤)州: 치소, 현 산서성 진성시 동북 30리 떨어진 고도진)와 노[주](潞州: 치소, 현 산서성 양원현 북쪽)을 거쳐 나아가 [복고]회은과 만나 태원을 거쳐서 발하나(拔賀那)를 보내 표를 올려 동경을 회복한 것을 축하했고, 역적 사조의의 기치 등의 물자를 바쳤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자 대종이 내전으로 불러 보고서 비단 200단을 내려주었다. | 元帥雍王領子昂等從而見之,可汗責雍王不於帳前舞蹈,禮倨。子昂辭以元帥是嫡孫,兩宮在殯,不合有舞蹈。迴紇宰相及車鼻將軍庭詰曰:「唐天子與登里可汗約為兄弟,今可汗即雍王叔,叔姪有禮數,何得不舞蹈?」子昂苦辭以身有喪禮,不合。又報云:「元帥即唐太子也,太子即儲君也,豈有中國儲君向外國可汗前舞蹈。」相拒久之,車鼻遂引子昂、李進、少華、魏琚各搒捶一百,少華、琚因搒捶,一宿而死。以王少年未諳事,放歸本營。而懷恩與迴紇右殺為先鋒,及諸節度同攻賊,破之,史朝義率殘寇而走。元帥雍王退歸靈寶。迴紇可汗繼進於河陽,列營而止數月。去營百餘里,人被剽劫逼辱,不勝其弊。懷恩常為軍殿。及諸節度收河北州縣,僕固瑒與迴紇之眾追躡二千餘里,至平州石城縣,梟朝義首而歸,河北悉平。懷恩自相州西出崞口路而西,可汗自河陽北出澤、潞與懷恩會,歷太原,遣使拔賀那上表賀收東京,并進逆賊史朝義旌旗等物。辭還蕃,代宗引見於內殿,賜綵二百段。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