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정권의 실력이다
출처: 조선일보, 입력 : 2015.04.22 03:20
박 대통령은 경제 살리기를 평생의 염원으로 앞세우고 2015년을 골든타임이라더니 거듭 여권發 스캔들에 발 묶여 형편없는 위기 수습 실력으로 골든타임 허송하고 의혹 키워
박근혜 대통령에게 '경제 살리기'는 단 한순간도 잊을 수 없는 필생의 염원인 게 분명하다. 중남미 순방 중에 접한 이완구 국무총리의 사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박 대통령은 거듭 '경제 살리기'를 강조했다. 청와대는 이 총리 사퇴 문제에 대한 박 대통령의 입장을 담은 200자 원고지 한 장 조금 넘는 서면 브리핑 자료를 내놨다. 이 짤막한 대통령 '말씀 자료' 속에서 유일하게 두 번 등장한 단어가 '경제 살리기'다. 정작 '총리'라는 말은 딱 한 번 나왔다.
이번만 그런 게 아니다. 박 대통령은 그간 '경제' '투자' '기업' '민생'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작년 10월 박 대통령의 국회 연설이 대표적인 예다. 박 대통령은 이때도 '경제'란 말을 59번이나 했다. 정치인 연설에서 으레 문장의 앞머리마다 등장하는 국민(31회)이란 단어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이 연설에서 박 대통령은 2015년은 경제를 살릴 마지막 골든타임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 임기 3년차이면서 큰 선거가 없는 올해야말로 경제에 전념할 수 있는 '황금 시간'이라는 뜻이다.
이 주장의 위력은 막강했다. 이 정권이 하는 일마다 반대해온 야당도 여기에 맞설 논리를 찾지 못해 쩔쩔맸다.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지금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중대하고 시급한 과제는 없다는 데 대다수 국민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야당이 작년 말 예산안과 부동산법을 비롯해서 정부가 '민생 법안'으로 지목한 각종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데 동의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았다.
이렇게 외부 환경이 얼추 갖춰져 가고 있을 무렵 엉뚱한 곳에서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박 대통령 주변에서다. 과거 박 대통령을 보좌했던 정윤회씨의 '국정 개입 의혹'이 불거졌다. 박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보좌하던 사람들이 이 문제를 들고나왔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 주변 가신(家臣) 그룹과 대통령 남동생을 앞세운 세력이 벌인 권력 암투의 일부가 드러났다. 결국 대통령의 남동생과 숨겨진 실세로 불리던 정윤회씨 등이 차례로 검찰에 출두했다. 박 대통령이 경제 골든타임을 주장한 지 한 달 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무려 석 달이 걸렸다. 물론 의혹의 실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실체가 없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대통령과 이 정권의 실력이다. 이 일을 통해 청와대의 기강 해이와 무능(無能)이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할 인물로 지목된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물러나는 데 석 달이나 걸렸다. 그 사이 온 나라가 대통령 주변에서 벌어진 권력 암투극에 정신이 팔렸다. 여당의 관심은 이 문제로만 향했고 야당은 모든 화력을 여기에 집중했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대통령의 호소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이런 식으로 경제 골든타임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개월을 허송했다.
'정윤회 사건'의 포연(砲煙)이 겨우 가라앉는가 싶은 시점에 '성완종 리스트'가 터졌다. 이로 인해 현직 국무총리가 취임 두 달여 만에 자리를 내놨다. 따지고 보면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역시 박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도왔던 공신 중 한 명이다. 결국 이번에도 여권발(發) 위기가 박 대통령의 골든타임을 다 집어삼킬 듯한 기세다. 무엇보다 대통령을 비롯한 이 정권 스스로가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불확실성이야말로 경제의 최대 적(敵)이다. 기업들에 대한 검찰 수사도 마찬가지다. '경제 골든타임' 노래를 부르던 정권이 어느날 갑자기 총리를 앞세워 대대적인 '기업 사정(司正)' 방침을 발표했다. 우회전 깜박이를 켜고 갑작스레 좌회전을 시도한 끝에 결과적으로 '성완종 리스트'라는 대형 충돌 사고를 부른 꼴이 됐다. 괜한 오해를 만들고 의혹을 키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정권이다.
이번 성완종 사태를 수습하기까지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할지는 예측조차 어렵다. 이완구 총리의 거취만 해도 그렇다. 박 대통령은 출국 직전 이에 대해 "귀국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랬던 대통령이 나흘 만에 마음을 바꿨다. 나흘 동안 나라 전체가 총리 거취만 쳐다보게 만들어 놓고서 말이다. 앞으로 새 총리를 찾아 임명하기까지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더 벌어질지 알 수도 없다. 이 정권 들어 국회 청문회에 서 보지도 못하고 낙마한 총리 후보자만 3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거듭된 호소 덕분에 이제 경제 살리기를 향한 대통령의 간절한 마음은 국민에게도 전달됐다. 그러나 국민은 동시에 이 정권의 실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여기에 맞서 이 정권의 실력과 수준을 입증할 수 있는 골든타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시간마저 지금껏 해온 것처럼 허송하고 나면 가파른 레임덕이라는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박두식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