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67, 구당서 발해전-1)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0. 구당서 발해전 ※ 구당서 발해전 출처: 1) 번역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통사/ 중국정사조선전/ 舊唐書/ 北狄列傳/ 渤海靺鞨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舊唐書/列傳/ 卷一百九十九下/ 北狄/ 渤海靺鞨 구당서 북적열전 발해말갈전(권199 하) 번 역 문 | 원 문 | 1)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가속(家屬)을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와 살았다. 만세통천 연간(696년)에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니,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와 함께 각각 [그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망명하여 요해지를 차지하여 수비를 굳혔다. (이)진충이 죽자, (무)측천이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 잔당을 토벌케 하니, (이해고는)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베고, 또 천문령을 넘어 (대)조영을 바짝 뒤쫓았다. (대)조영이 고구려· 말갈의 무리를 연합하여 (이)해고에게 항거하자, 당나라 군사는 크게 패하고 (이)해고만 탈출하여 돌아왔다. [이때] 마침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에게 항복을 하므로 길이 막혀서 측천(무후는 [그들을] 토벌할 수 없게 되었다. (대)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가서 계루(桂婁)부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 渤海靺鞨大祚榮者,本高麗別種也。高麗既滅,祚榮率家屬徙居營州。萬歲通天年,契丹李盡忠反叛,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保阻以自固。盡忠既死,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黨,先破斬乞四比羽,又度天門嶺以迫祚榮。祚榮合高麗、靺鞨之眾以拒楷固,王師大敗,楷固脫身而還。屬契丹及奚盡降突厥,道路阻絕,則天不能討,祚榮遂率其眾東保桂婁之故地,據東牟山,築城以居之。 | 2) (대)조영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을 잘 하자, 말갈의 무리 및 고구려의 패잔병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성력 연간(698~699년)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에 올라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그 땅은 영주(營州) 동쪽 2천리 밖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서로 접하고 있다. 월희말갈에서 동북으로는 흑수말갈에 이르는데, 사방이 2천리이며, 편호(編戶)는 십여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명이다.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같고, 문자(文字) 및 전적(典籍)도 상당히 있다. (당)중종이 즉위하여(705년), 시어사 장행급을 보내어 불러다 달래니, 대조영이 아들을 보내어 입시(入侍)시켰다. 이때 책립(册立)을 하려 하는데, 마침 거란과 돌궐이 해마다 변경을 침입하므로 사신의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다. (당)예종 선천 2년(713년)에 낭장 최흔을 보내어 (대)조영을 책봉하여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고, 아울러 거느리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로 삼아서 홀한주도독의 직(職)을 더 주었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 祚榮驍勇善用兵,靺鞨之眾及高麗餘燼,稍稍歸之。聖曆中,自立為振國王,遣使通于突厥。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南與新羅相接。越憙靺鞨東北至黑水靺鞨,地方二千里,編戶十餘萬,勝兵數萬人。風俗與高麗及契丹同,頗有文字及書記。中宗即位,遣侍御史張行岌往招慰之。祚榮遣子入侍,將加冊立,會契丹與突厥連歲寇邊,使命不達。睿宗先天二年,遣郎將崔訢往冊拜祚榮為左驍衞員外大將軍、渤海郡王,仍以其所統為忽汗州,加授忽汗州都督,自是每歲遣使朝貢。 | 3)○개원 7년(719년)에 (대)조영이 죽으니, (당)현종이 사신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이어서 그의 적자(嫡子) 계루군왕(桂婁郡王) 대무예를 책립(冊立)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 開元七年,祚榮死,玄宗遣使弔祭,乃冊立其嫡子桂婁郡王大武藝襲父為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忽汗州都督。 | 4)○(개원) 14년(726년)에 흑수말갈이 사신을 보내 내조하자 (당 현종은) 조서로 그 땅을 흑수주(黑水州)로 삼아 장사(長史)를 두고, 사신을 보내어 진(鎮)을 관리하게 하였다. (대)무예가 부하들에게, “흑수(黑水)가 우리 국경을 거쳐서 처음으로 당(唐)과 서로 통하였다. 지난날 돌궐에게 토둔(吐屯)을 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리고 함께 갔었다. 이제 뜻밖에 바로 당(唐)의 벼슬을 청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당(唐)과 공모를 하여 앞뒤로 우리를 치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친아우 대문예 및 그의 장인 임아(任雅)를 시켜 군대를 이끌고 가서 흑수를 치게 하였다. (대)문예는 일찍이 볼모로 서울(장안)에 왔다가 개원(713~741년) 초년에 본국에 돌아갔으므로, 이때 (대)무예에게, “흑수가 당(唐)의 벼슬을 청하였다 하여 그를 바로 치고자 한다면 이는 당(唐)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당(唐)은 사람의 많음과 군사의 강함이 우리의 1만배가 되는데, 하루아침에 원수를 맺는다면 스스로 멸망을 부를 뿐입니다. 지난날 고구려가 전성(全盛)할 적에 강병 30만으로 당(唐)과 맞서서 복종을 하지 않다가, 당병(唐兵)이 한번 덮치매 땅을 쓴듯이 다 멸망하였습니다. 오늘날 발해의 인구가 고구려의 몇분의 일도 못되는데, 그래도 당을 저버리려 하니, 이 일은 결단코 옳지 못합니다.”하였으나, (대)무예는 듣지 않았다. (대)문예의 군사가 국경에 이르렀을 적에 또 글을 올려 굳이 간하자, (대)무예는 화를 내어 사촌형 대일하를 보내어 (대)문예를 대신하여 군사를 통괄하게 하고, (대)문예는 불러다 죽이려 하였다. (대)문예가 마침내 그의 무리를 버리고 사잇길로 도망쳐 오니, (당현종은) 조서로 좌효위장군을 제수하였다. 얼마후 (대)무예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이어서 표문(表文)을 올려 (대)문예의 죄상을 극력 말하고 죽여 주기를 청하였다. (당)현종은 몰래 (대)문예를 안서로 보내고 (대)무예에게는, “(대)문예가 먼 곳에서 귀순해 왔으므로 의리상 죽일 수가 없었소. 이제 영남으로 유배하였는데 벌써 길을 떠났오.”라고 회보하는데, 그의 사신 마문궤와 총물아는 머물러 있게 하고, 따로 사신을 파견하여 회보케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곧 누설한 자가 있어서 (대)무예는 또 글을 올려, “대국은 남에게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찌 거짓을 일삼는단 말입니까? 이제 들으니, (대)문예가 영남으로 떠나지 않았다 합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앞서 청한대로 죽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홍려소경 이도수와 원복은 관속(官屬)을 독찰(督察)하지 못하여 일을 누설시킨 죄로, (이)도수는 조주자사로 좌천되고 (원)복은 택주자사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대)문예를 잠시 영남으로 보내고서 (대무예에게) 회보하였다. | 十四年,黑水靺鞨遣使來朝,詔以其地為黑水州,仍置長史,遣使鎮押。武藝謂其屬曰:「黑水途經我境,始與唐家相通。舊請突厥吐屯,皆先告我同去。今不計會,即請漢官,必是與唐家通謀,腹背攻我也。」遣母弟大門藝及其舅任雅發兵以擊黑水。門藝曾充質子至京師,開元初還國,至是謂武藝曰:「黑水請唐家官吏,即欲擊之,是背唐也。唐國人眾兵強,萬倍於我,一朝結怨,但自取滅亡。昔高麗全盛之時,強兵三十餘萬,抗敵唐家,不事賓伏,唐兵一臨,掃地俱盡。今日渤海之眾,數倍少於高麗,乃欲違背唐家,事必不可。」武藝不從。門藝兵至境,又上書固諫。武藝怒,遣從兄大壹夏代門藝統兵,徵門藝,欲殺之。門藝遂棄其眾,間道來奔,詔授左驍衛將軍。武藝尋遣使朝貢,仍上表極言門藝罪狀,請殺之。上密遣門藝往安西,仍報武藝云:「門藝遠來歸投,義不可殺。今流向嶺南,巳遣去訖。」乃留其使馬文軌、勿雅,別遣使報之。俄有洩其事者,武藝又上書云:「大國示人以信,豈有欺誑之理!今聞門藝不向嶺南,伏請依前殺却。」由是鴻臚少卿李道邃、源復以不能督察官屬,致有漏洩,左遷道邃為曹州刺史,復為澤州刺史。遣門藝暫向嶺南以報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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