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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묵철이라는 자는,골돌록의 아우이다. 골돌록이 죽었을때,그 아들이 아직 어려서,묵철이 마침내 그 지위를 찬탈하여,스스로 가한에 즉위하였다. 장수2년(693년),무리를 통솔하고 영주에 침구하여,백성과 관리를 죽이고 약탈하니, (무)측천이 백마사의 중 설회의를 대북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18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토벌하도록 보냈으나,적을 만나지 못하자,얼마 안되어 군대를 돌려 돌아왔다. 묵철이 잠시 후 사신을 보내 내조하니,(무)측천이 크게 기뻐하며,좌위대장군을 제수하고,귀국공으로 책봉하며,재물 5천단을 하사하였다. 다음해,다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또 천선가한을 덧붙여 제수하였다. | 默啜者,骨咄祿之弟也。骨咄祿死時,其子尚幼,默啜遂篡其位,自立為可汗。長壽二年,率眾寇靈州,殺掠人吏。則天遣白馬寺僧薛懷義為代北道行軍大總管,領十八將軍以討之,既不遇賊,尋班師焉。默啜俄遣使來朝,則天大悅,冊授左衞大將軍,封歸國公,賜物五千段。明年,復遣使請和,又加授遷善可汗。 |
만세통천 원년(696년),거란 수령 이진충、손만영이 (당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켜,영(주 도둑)부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자,묵철이 사신을 보내 말씀을 올렸다:「청컨대 하서의 항복한 주민들을 돌려주신다면,즉시 부락의 병사와 말을 통솔해 국가(당나라)를 위하여 거란을 쳐서 토벌하겠습니다.」제서로 허락하였다. 묵철이 드디어 거란을 공격하여 토벌하자,(그) 부족의 무리가 크게 무너져,그 가구(家口)가 다 잡혔으며,묵철은 이로부터 병력과 무리가 점차 강성하여 졌다. (무)측천은 바로 사신을 보내 묵철을 특진、힐질리시 대선우、입공보국 가한으로 책봉하였다. 성력원년(698년),묵철이 표를 올려 (무)측천에게 아들이 되겠다고 청하고,아울러 딸이 있다고 말하며,화친을 청하였다. 애초에,함형 연간(670~673년)에,돌궐 여러 부락의 투항해 귀부한 자들이,대부분 풍、승、영、하、삭、대 등 6주 여러 곳에 살았는데,(이들을) 항호(降戶)라고 말하였다. 묵철이 이때가 되자 또 이 항호와 선우 도호부의 땅을 원하면서,아울러 농기구와 종자를 청하니,(무)측천이 처음에는 불허하였다. 묵철이 크게 원망하고 노여워하여,언사가 심히 거만하며,우리 사신 사빈경 전귀도를 구속하고,장차 해치려고 하였다. 당시 조정은 그 군사의 위세를 두려워하여,납언 요숙과 난대시랑 양재사가 건의하여 그 화친을 허락할 것을 청하니,마침내 6주의 항호 수천 장(帳)을 다 몰고 갔으며,아울러 종자(種子) 4만여석과 농기구 3천사를 함께 주니,묵철이 이 이유로 점차로 강성하게 되었다. | 萬歲通天元年,契丹首領李盡忠、孫萬榮反叛,攻陷營府,默啜遣使上言:「請還河西降戶,即率部落兵馬為國家討擊契丹。」制許之。默啜遂攻討契丹,部眾大潰,盡獲其家口,默啜自此兵眾漸盛。則天尋遣使冊立默啜為特進、頡跌利施大單于、立功報國可汗。聖曆元年,默啜表請與則天為子,并言有女,請和親。初,咸亨中,突厥諸部落來降附者,多處之豐、勝、靈、夏、朔、代等六州,謂之降戶。默啜至是又索此降戶及單于都護府之地,兼請農器、種子,則天初不許。默啜大怨怒,言辭甚慢,拘我使人司賓卿田歸道,將害之。時朝廷懼其兵勢,納言姚璹、鸞臺侍郎楊再思建議請許其和親,遂盡驅六州降戶數千帳,并種子四萬餘碩、農器三千事以與之,默啜浸強由此也。 |
그해(698년),(무)측천이 위왕 무승사의 아들 회양왕 (무)연수에게 명하여 그 딸을 받아들여 왕비로 삼도록 하고,우표도위대장군 염지미를 임시 춘관상서로,우무위위랑장 양제장을 임시 사빈경으로 (삼아 함께) 보내며,금과 비단을 많이 주어,오랑캐의 궁정에 송부하였다. (일)행이 흑사의 남쪽 궁정에 도착하자,묵철이 (염)지미 등에게 일러 말했다.:「내 딸을 이씨 가문인 천자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는 줄 알았는데,너희가 지금 무씨 가문의 아들을 데리고 오니,이 아이는 천자의 아들인가 아닌가? 우리 돌궐은 누대 이래로,이씨 가문에 항복하여 귀부하였는데,지금 들으니 이씨 가문 천자의 종자가 끝이나 전부 없어지고,오직 두 아이만 남아있다고 하니,내가 지금 병사들을 거느리고 (두 아이를 황제로) 옹립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마침내 (무)연수 등을 체포하여,별도의 장소에 구속하고,가짜로 (염)지미를 가한으로 삼아,함께 무리 십여만을 통솔하여,우리의 정난군과 평적군、청이군 등의 군대를 습격하니,정난군사 좌옥검위장군 모용현즉이 병사 오천명을 들어 항복하였다. 잠시 후 규(주)、단(주) 등의 주(州)로 진격하여 침구하니,(무)측천이 사속경 무중규를 천병 중도대총관으로 삼고,우무위위장군 사타충의를 천병 서도전군총관으로 삼고,유주도독 장인단을 천병 동도총관으로 삼아,병사 30만을 통솔하여 치도록 명하였다. 우우림위대장군 염경용을 천병 서도후군총관으로 삼아,병사 15만을 거느리고 후원하도록 하였다. 묵철이 또 긍악도로부터 나와,울주를 침구하고,비호현을 함락하였다. 잠시 후 정주(定州)로 진격하여 공격해서,자사 손언고를 죽이며,백성들의 오두막과 집을 불 태우고,남녀를 노략질하여 사로잡아,나이가 어리고 많고 없이 모두 죽였다. (무)측천이 대노하여,묵철을 목베는 자는 왕에 봉한다는 상을 내걸었으며,묵철의 칭호를 고쳐 참철로 하였다. 얼마 안되어 또 조주를 포위하여 핍박하니,장사 당파약이 도리어 성(을 가지고) 호응하려고 하였는데,자사 고예가 항거해 절개(를 지켜) 따르지 않았으나,마침내 살해 당하였다. (무)측천 이에 여릉왕을 황태자로 세우고,하북도행군대원수를 맏도록 명령하였으나,군대가 아직 출발하기도 전에 묵철이 조(주)、정(주) 등의 주(州)에 있는 남녀 8~9만명을 모두 강탈하여,오회도를 따라 가면서,통과하는 곳마다 잔인하게 학살하니,(그 숫자를)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타충의와 후군총관 이다조 등이 모두 중요한 병사를 가졌으나,적과 서로 바라볼뿐,감히 싸우려 하지 않았다. 하북도원수 납언 적인걸만이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추격하였으나,미치지 못하였다. | 其年,則天令魏王武承嗣男淮陽王延秀就納其女為妃,遣右豹韜衞大將軍閻知微攝春官尚書,右武威衞郎將楊齊莊攝司賓卿,大齎金帛,送赴虜庭。行至黑沙南庭,默啜謂知微等曰:「我女擬嫁與李家天子兒,你今將武家兒來,此是天子兒否?我突厥積代已來,降附李家,今聞李家天子種末總盡,唯有兩兒在,我今將兵助立。」遂收延秀等,拘之別所,偽號知微為可汗,與之率眾十餘萬,襲我靜難及平狄、清夷等軍,靜難軍使左玉鈐衞將軍慕容玄崱以兵五千人降之。俄進寇媯、檀等州,則天令司屬卿武重規為天兵中道大總管,右武威衞將軍沙吒忠義為天兵西道前軍總管,幽州都督張仁亶為天兵東道總管,率兵三十萬擊之。右羽林衞大將軍閻敬容為天兵西道後軍總管,統兵十五萬以為後援。默啜又出自恆岳道,寇蔚州,陷飛狐縣。俄進攻定州,殺刺史孫彥高,焚燒百姓廬舍,虜掠男女,無少長皆殺之。則天大怒,購斬默啜者封王,改默啜號為斬啜。尋又圍逼趙州,長史唐波若翻城應之,刺史高叡抗節不從,遂遇害。則天乃立廬陵王為皇太子,令充河北道行軍大元帥,軍未發而默啜盡抄掠趙、定等州男女八九萬人,從五回道而去,所過殘殺,不可勝紀。沙吒忠義及後軍總管李多祚等皆持重兵,與賊相望,不敢戰。河北道元帥納言狄仁傑總兵十萬追之,無所及。 |
(성력)2년(699년),묵철은 그 아우 돌실복을 좌상찰로 세우고,골돌록의 아들 묵구를 우상찰로 세웠는데,각기 병마 2만여명을 관장하게 하였다. 또 그 아들 복구를 작은 가한으로 세웠는데,그 지위는 양찰의 위에 있었으며,처목곤 등 10성(姓)의 병마 4만여명을 관장하게 하고,또 호칭을 척서가한이라고 하였고,이로부터 해마다 변경을 침구하였다. 구시원년(700년),농우에 있는 제감의 말 만여필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제서로 우숙정어사대부 위원충을 영무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대비하였고,또 안북대도호 상왕 (이)단을 천병도원수로 삼아,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쳐서 토벌하라고 명하였으나,마침내 실행하기도 전에 적이 물러났다. | 二年,默啜立其弟咄悉匐為左廂察,骨咄祿子默矩為右廂察,各主兵馬二萬餘人。又立其子匐俱為小可汗,位在兩察之上,仍主處木昆等十姓兵馬四萬餘人,又號為拓西可汗,自是連歲寇邊。久視元年,掠隴右諸監馬萬餘匹而去。制右肅政御史大夫魏元忠為靈武道行軍大總管以備之,又命安北大都護相王旦為天兵道元帥,統諸軍討擊,竟未行而賊退。 |